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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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 - 발견과정

작성일2019.09.25

발견과정

플로레스 섬의 발굴 시작

1995년 당시 고고학자인 마이크 머우드 박사는 오스트레일리아 뉴 사우스 웨일에 있는 뉴 잉글랜드(New England) 대학의 강사였다. 몇 년 동안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관한 고고학,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킴벌리(Kimberley) 지역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킴벌리는 260만 년 전에서 1만 1천 년 전 사이 플라이스토세 시기 동안 아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으로 이동한 최초의 사람들이 상륙한 지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가장 최근의 연구는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최초의 이동을 4만 년 전에서 6만 년 전 사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무렵에 머우드는 최초의 호미닌이 이용했었을 윌리스선의 3가지 잠재적 경로를 함께 조사할 수 있는 합동 연구를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들에게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답변을 받지 못한 머우드는 결국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직접 떠나서 자신의 연구 계획에 관심을 보였던 국립 고고학 센터(ARKENAS)의 판지 소에조노(Pandji Soejono) 교수와 지질 연구소(GRDC)의 파초엘 아지즈(Fachroel Aziz) 박사를 만나 자기소개를 했다. 아지즈 박사는 즉시 공동 프로젝트에 반응을 보이며 머우드에게 공동 발굴을 제안했다. 마침 몇 년 동안 그와 그의 팀이 여러 고고학 유적지에서 석기 도구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레스 주변의 소규모 프로젝트 몇 개가 오스트레일리아-인도네시아 공동 프로젝트팀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젝트팀은 GRDC, ARKENAS, 가자마다(Gadjah Mada) 대학, 오스트레일리아 노스이스턴(Northeastern) 대학의 다른 고고학자들이 합류하면서 서서히 규모를 키웠다. 그리고 2001년 플로레스 섬의 소아분지(Soa basin)를 시작으로 현장 조사를 시작했다. 몇몇 주목할 만한 발굴 성과를 이룬 연구자들은 비교분석을 위해서 리앙부아 동굴을 깊게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머우드 교수는 리앙부아를 처음 봤을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처음으로 동굴로 들어갔을 때, 나는 즉시 그 동굴의 크기에 놀랐습니다.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크기가 인상적이었지요. 그곳은 널찍했고, 북쪽 전망으로 빛이 잘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평평하고 잘 마른 점토 바닥으로 되어있어서, 살기에 매우 아늑한 장소로 보였습니다.”

신부님의 발자취

리앙부아는 인도네시아 동부에 자리 잡은 플로레스 섬에 있는 커다란 석회암 동굴이다. 플로레스 섬은 육상 동물상의 다양성이 낮고 섬 지방의 고유성이 아주 높은, 왈라스선에 위치한 섬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특성은 빙하시대 월러시(Wallacea)와 순다랜드(Sundaland) 서쪽으로는 아시아 본토, 그리고 사훌랜드(Sahulland) 동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서 고립된 지역으로 남았던 영향이기도 하다. 심지어 마지막 빙하기 동안에도, 플로레스 섬과 숨바와 섬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해협으로 인해서 플로레스 섬과 서쪽의 다른 섬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었다. 발리 섬과 롬복 섬 또한 서로 연결되지 않았었다.

리앙부아 발굴 프로젝트는 머우드 교수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 네덜란드인 선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테오도르 베르호벤 신부(Father Theodor Verhoeven)가 진행했던 선행 작업이 있었고, 이후에는 소에조노 교수 같은 전문 고고학자들의 1980년대 발굴을 더 진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머우드 교수의 지휘로 국제협력 연구팀이 2001년 3월, 리앙부아의 현대적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50년 전 먼저 리앙부아의 가능성을 알아본 베르호벤 신부는 레이든 대학에서 고전사학 석사학위를 위해 폼페이를 연구한 고고학에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마타 멘지(Mata Menge)와 인근의 또 다른 화석 유적지인 보아 레사(Boa Lesa)에서 그는 스테고돈(Stegodon) 유물과 함께 두꺼운 화산재 층 사이에 끼어 있는 사암층에 있는 조각 도구, 절단 도구, 손도끼 등 석기 유물을 다수 발견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베르호벤 신부는 초기 인간과 스테고돈이 플로레스에 공존한다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스테고돈과 호모 에렉투스는 약 75만 년 전에 자바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마타 멘지의 석기들은 비슷한 연령이며, 호모 에렉투스는 어떻게든 플로레스에 도달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0년 또 다른 신부인 요하네스 마링거 신부(Father Johannes Maringer)와 함께 소아 분지에서 추가 발굴을 한 후, 베르호벤은 그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저널 <인류학(Anthropos)>에 발표했다.

그의 증거는 석기 도구에 대한 그의 검증, 실제의 석기들이 훨씬 오래된 화석과 뒤섞였을 가능성, 그리고 스테고돈이 플로레스에서 살았을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고고학계에서 무시되었다.

사실 플로레스 섬은 초기 인류의 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아시아와 호주의 대륙지역과 거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위치한 플로레스 섬은 아시아와 호주-멜라네시아(Asia and Australia-Melanesia) 사이의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경계선상에 있으며, 현생인류가 대호주(Greater Australia)의 초기 식민지화를 가능하게 한 경로에 있다. 그러나 이 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의 바다를 횡단해야 한다.

이러한 깊은 바다 장벽 중 첫 번째는 발리와 롬복 섬 사이의 25킬로미터의 해협이고, 두 번째는 숨바와와 플로레스 섬 사이의 9킬로미터의 해협이다. 최근까지, 오직 현생인류만이 바다를 건너는데 필요한 지적, 언어적, 기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플로레스에서 발견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와 관련된 증거는 이 가정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그것은 엄청난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초기 인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의 능력과 업적을 끊임없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시원한 동굴 이야기

커피나무 사이에 숨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리앙부아 동굴로 들어가면 폭이 약 50 미터, 높이가 20 미터인 거대한 동굴이다. 바깥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하고 시원하기 때문에 망가라이 말로 “Liang Bua” 즉 "시원한 동굴(cool cav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플로레스 섬에서 리앙부아 동굴은 항상 특별한 장소로 여겨졌다. 지난 10,000 년 동안 죽은 자들을 위한 의식이 이곳에서 진행된 것이다. 플로레스의 주민들은 고인의 뼈를 황토를 칠하거나 조개로 장식한 다음 동굴에 보관했다. 곡물 재배가 소개된 약 4천 년 전에는 냄비나 자귀와 같은 물품이 죽은자와 함께 매장되었고, 2천여 년 전부터는 청동과 철기 유물을 함께 매장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도 플로레스의 주민들은 조상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동굴의 뒤쪽에 달걀과 음식을 제물로 두기도 한다.

리앙부아 동굴의 서늘하면서도 햇빛이 잘 들어오는 환경은 한눈에 인간이 살기에 적합해 보인다. 리앙부아 동굴은 베르호벤 신부가 선교사로 머물던 시절에 섬 어린이들을 위한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을 정도로 평평하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발견되지 전까지, 이 동굴을 사용한 인류에 대한 가장 초기의 증거는 9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동물이 이 동굴을 보금자리로 이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12,000년 전 거대한 화산 폭발이 발생하면서 이 지역 식물과 동물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고, 이들의 삶에 대한 증거는 모두 화산재 아래에 덮였다.

인도네시아와 호주의 합동 발굴팀이 리앙부아 동굴을 깊이 파내려 가자 수만 년 동안 흙 속에 묻혀있던 유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스테고돈의 이빨과 뼈 화석이었다. 발굴팀은 최소 47개체의 스테고돈 부분 골격을 회수했다. 현재는 멸종한 원시 코끼리 스테고돈은 물소만한 크기에 체중은 500kg 정도였다. 이 스테고돈의 화석은 이후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수수께끼(작은 크기와 생존 연대)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스테고돈은 여러 종들이 있는데 그 크기가 종마다 제각각이다. 중국에서는 키가 4m에 몸무게는 13톤 가까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이 든 수컷 개체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장비목 포유류 중에서도 상당한 덩치이다. 반면 리앙부아에서 발견된 스테고돈의 경우는 키 1.2m에 무게는 300~400kg 정도로 추정된다.

놀라운 작은 뼈

1980년대 소에조노 교수가 진행하다 멈춘 지역을 다시 발굴하기 시작한 연구팀의 성과는 놀라왔다. 한번은 연구자들이 동굴 바닥의 단단한 종유석을 파냈는데, 그 바로 아래층에 석기 도구, 뼈와 이빨 등의 유물로 가득 차 있었다. 1세제곱미터당 최대 5천 개의 인공 유물이 있었다. 유물을 발굴하는데 매 시즌 거의 200톤의 퇴적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유물의 발견은 동굴에서 매우 오래된 인류가 거주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떤 종이 살았냐는 것일 뿐이었다. 연구자들이 대략 6m 깊이에서 인간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조그만 팔뼈 하나를 찾자, 발굴을 위한 노력을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다 얼마가지 않아 머우드가 진정으로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머우드는 “리앙부아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기 나는 매일 밤 호텔에서 진행 상황을 보고 받는 통화를 했다. 8월 10일 토마스는 내게 전화해서 오래된 아이의 유골을 6m 깊이의 Sector 7에서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그것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스테고돈 뼈와 인공 유물과 같이 있는 호미닌을 찾아냈다. 우리 프로젝트의 시작 첫해부터 순조로운 출발이었다.”고 그날을 기억했다.

그리고 며칠 후 발굴팀은 두개골 하나를 발견했는데 동물과 인간의 뼈를 전공한 발굴팀의 과학자가 두개골을 살펴본 뒤 “‘맞아요. 난 이게 인간 뼈라고 확신합니다. 근데 너무 작네요.”라고 말했다. 호미닌 뼈의 발견은 그 어떤 발견보다 리앙부아 발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어떤 호미닌 뼈라도 발견되기 전까지는 현장에서 발견된 광범위한 석기 도구 모음을 특정 종과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진짜 호미닌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연구자들은 화석화된 호미닌과 그들이 동굴에서 발견해낸 석기 도구를 연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현장에서는 완벽한 두개골 하나를 포함해서 총 9개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뼈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현장 연구자들과 발굴자들은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명백히 “사람”인 무엇이긴 했는데, 그것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호모의 어느 종에 속하는지, 몇 살이나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머우드 교수는 유골의 스케치를 같은 대학의 동료인 고인류학자 피터 브라운(Peter Brown) 박사에게 보내고, 직접 유골을 보고 확인하도록 그를 초대했다.

“마이크[머우드]는 인간의 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습니다.” 브라운은 2014년 칼러웨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무척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자카르타로 갔습니다. 자카르타는 매우 흥미로운 장소입니다. 나는 그곳 음식도 매우 좋아하고, 기후나 문화, 모든 것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무언가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신석기시대나 그 이전 시기의 성장기가 거의 끝난 현생 인류의 두개골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병리적 문제를 가진 개인으로, 성장 장애를 가졌을 거라는 겁니다. 그게 내 예상이었습니다.” 브라운과 과학계는 머지않아 그들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 두개골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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