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zombie

철학적 좀비

철학적 좀비

현대철학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 사고실험인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는 현대의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좀비의 근원은 크레올어인 ‘zombi’로 아이티의 부두교 의식에 등장하는 말이다. 보통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좀비는 썩은 몸을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다가 인간을 발견하면 잡아먹는 괴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철학적 좀비는 오히려 겉보기에 우리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단지 그들은 “의식”이 없는 존재로 아무런 감각이 없는 존재이다. 즉, 육체적으로는 인간처럼 만들어지고 전혀 의식이 없는 생물의 존재를 가정한 것이 철학적 좀비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복제할 수 있어서 그의 뇌를 재생산하고 그 속의 모든 뉴런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뇌를 가진 존재는 스스로를 지각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인간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좀비일까?

확대 그림 1.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는 인간의 유전자를 토대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인 ‘레플리칸트’가 등장한다. 이 레플리칸트는 인간을 대신해서 식민지의 위험한 일을 대신하거나 전투용 군인으로 쓰이다가 4년이 지나면 안정상의 이유로 폐기된다.

쉬운 이해를 위해 가까운 미래에 인간이 이웃 행성에서 무제한의 우라늄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라늄의 채굴은 지구의 모든 에너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그 행성의 방사능 수치가 독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인간 광부들은 불과 몇 년밖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인간을 보내는 것이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결국 심각한 방사선 중독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인간의 유전자로 탄생한 생명체이니 인간처럼 병에 걸리고 고통을 겪다 죽을 것이다. 인간은 그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아니면 ‘의식이 없다면’ 그것은 기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죽음의 행성으로 보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만약 이 같은 가정이 낯설지 않다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알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림 1) 그리고 지금까지 ‘안드로이드들 중 일부가 의식을 가지면서 자신의 운명과 존재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하며 진행되는 SF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철학적 좀비는 철학의 오랜 사상인 ‘이원론’ 문제를 현대적으로 가정한 것이다. 이원론은 오랜 역사적,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이다. 데카르트는 인간 존재를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인 ‘육체’와 그렇지 않은 ‘의식’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것(사유하는 실체)과 물질적인 것(연장실체)이라는 명확한 구분은 문제가 있었다. 존재론적으로는 분리된 정신과 육체가 어디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것일까? 정신과 물질은 어딘가에서 연결됐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대뇌의 중간에 있는 작은 부위인 송과체松果體에서 정신과 육체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송과체는 멜라토닌 호르몬을 분비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일 뿐이다. 질병이나 사고로 뇌를 다치거나 잘린다면 더 정교한 운동은 할 수 없겠지만 정신과 영혼이 그림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판화작품. <인간 생계의 도구Humani Victus Instrumenta>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냄비와 포크같은 주방도구를 모아 남성의 얼굴을 구성했다 사라지진 않는다.

확대 그림 2. 그림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판화작품.
<인간 생계의 도구Humani Victus Instrumenta>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냄비와 포크같은 주방도구를 모아 남성의 얼굴을 구성했다

기계 속 영혼의 존재

미분학의 원리를 발전시킨 뛰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Leibniz 역시 정신과 육체 사이의 관계를 고민했다. 아래 구절은 종종 라이프니츠의 풍찻간 논쟁이라고도 불린다.

생각하고, 이해하고, 지각하는 구조를 가진 기계를 상상해보자. 이 그 기계 전체를 같은 비율로 확대하여, 마치 풍찻간 속에 들어가듯이 그 기계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나 그 경우, 기계의 내부에 들어가서, 우리는 부분 부분이 움직이고 있는 조각들만을 발견할 뿐, 표상에 대하여 설명할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모나돌로지monadologia』(1714년))

이 같은 사고실험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기계나 뇌와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의식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육체를 일종의 ‘기계’로 보는 것은 데카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카르트는 살아 움직이는 신체가 태엽 시계의 추의 작동원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뼈, 근육, 장기는 톱니바퀴, 피스톤, 캠 장치로 대체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태엽과 톱니바퀴로 작동하는 인형이 매우 유행했는데, 이 기계장치들은 데카르트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확대 그림 3. 소화하는 오리
확대 그림 4.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인 Pierre Jaquet-Droz이 만든 작은 소년 모양의 오토마타는 6000여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다. 태엽을 돌리면 소년의 팔이 움직여 잉크에 깃털 펜을 담근 다음 최대 40자의 문장을 쓸 수 있다.

니바퀴로 작동하는 인형이 매우 유행했는데, 이 기계장치들은 데카르트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발명품은 프랑스의 발명가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이 제작한 ‘소화하는 오리’였다. 이 기계오리는 고개를 돌려 곡물 알갱이를 먹은 다음, 위 모양의 주머니를 움직이며 소화 시킨 곡물은 똥으로 배설했다. (그림3)(https://vimeo.com/14904318 에서 소화하는 오리의 복제품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보캉송은 이 오리 내부에 소화 과정을 위한 화학기관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기계 오리가 음식을 먹으면 항문 뒤에 숨겨둔 주머니에서 녹색 물감을 섞은 빵부스러기가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당시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소화하는 오리의 인기를 두고 “이 똥 싸는 오리가 없었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프랑스의 영광을 상기시켜주겠는가?”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정교한 오토마타(자동기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희랍어로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을 뜻하는 ‘오토마타automata’는 16세기 유럽에 그대로 차용돼 기계라는 의미로 쓰였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인간의 몸은 자동기계와 다르지 않다.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송과체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서 영혼과 육체의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데카르트의 이런 생각을 철학자 다니엘 데넷Daniel Dennett은 ‘데카르트의 극장cartesian theater’이라고 비꼬았다. 우리의 뇌 한가운데에 앉아 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찰하고 조종하는 난쟁이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생각해보자. 호문쿨루스hmunculus라고 불리는 이 난쟁이는 우리 ‘몸이라는 집’ 속에 존재하며 우리 눈을 통해서 밖을 보고, 귀를 통해서는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을 보고, 피부를 통해서는 감촉을 느낀다. 우리의 생각 역시 그 작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기계인 몸을 조종하는 조종자이다. (그림5)

확대 그림 5. 사람들은 감각 입력이 모이고, 통합돼서 상연되는 내적 자아의 공간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림에서처럼 뇌 안에서 우리를 대신에 보고 듣고 느끼고, 최종적으로 생각까지 만들어주는 작은 사람 호문클루스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뇌에는 그런 장소는 없다.
확대 그림 6. 뇌과학 연구의 발전으로 시각을 비롯한 다양한 중추들이 발혀졌다. 데카르트 극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호문쿨루스homunculus의 탄생과 역사

호문쿨루스와 중세 연금술

호문쿨루스는 작은 인간, 난쟁이를 뜻하는 라틴어로, 중세 시대의 연금술 서적에서 처음으로 언급이 되었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다방면으로 해왔는데, 호문쿨루스는 당시 연금술사들이 연금술을 통해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인공 생명체들 중 하나이다. 16세기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그의 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방법을 기록했다.(그림 6). 그는 남자의 정액을 말의 자궁에 넣어 40일 동안 부패하도록 하면 비로소 작은 인간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호문쿨루스가 큰 관심과 열정으로 교육을 받아야 자라서 지적 능력을 보일 수 있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파라켈수스는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절차가 신이 인간에게 계시 한 가장 큰 비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생물학과 호문쿨루스

확대 그림 7. 연금술사 파라켈수스(1493-1541) 확대 그림 8. 1695년 하르트수커의 저서에 등장하는 호문쿨루스

작은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는 18세기의 생물학자들에게 이어졌다. 당시 학자들은 도대체 그 작은 수정란에서 어떻게 복잡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인간의 난자나 정자에 초소형 인간, 즉 호문쿨루스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견해를 전성설preformationism이라고 한다. 전성설은 수정란이 발생하여 성체가 되는 과정에서 개개의 형태, 구조가 이미 알 속에 갖추어져 있어 발생하게 될 때 전개된다는 학설이다. 그 당시에는 난자나 정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단순한 형태가 일정한 형태의 성체로 되는 것은 불가사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전성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미 정자와 난자 안에 성체의 축소형, 곧 호문쿨루스가 존재하며, 단지 성장을 통해 개체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체의 모든 기관들은 이미 정자와 난자에 축소형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개체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부풀어 커지는 것, 즉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가 볼 때는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18세기는 아직 세포에 대한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에는 결코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었다.

17세기에 현미경이 발명되자 과학자들은 다양한 물질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였는데, 그 중에는 정액도 포함되었다. 초기의 조악한 현미경 장비로 정자의 머리를 관찰하는 것에는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정자 머리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인간이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694년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하르트수커N. Hartsoeker는 그의 저서 『광학론Essai de Dioptrique』에 정자 안에 웅크리고 있는 조그만 인간의 형태를 그린 이미지를 실었다.(그림 7). 이 이미지는 호문쿨루스로 불렸으며 전성설 이론의 대표적 아이콘이 되어 배아발생학의 역사를 다루는 거의 모든 교재에 쓰이고 있다.

문학속의 호문쿨루스

19세기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실험실에서 인공 인간을 만들어 내는 장면이 등장한다.(그림 8-11). 파우스트 박사의 제자인 바그너가 수백 가지 물질을 혼합해 인간의 원질을 구성한 다음 시험관에 넣어 적당히 증류시켜 아주 작고 지혜로운 인공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파라켈수스 주장의 일부를 괴테가 이야기 속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파우스트에서 호문쿨루스는 아주 작고 귀여우며 시험관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호문쿨루스는 인간의 모든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바그너는 그때까지 해결할 수 없던 문제에 대해 갓 태어난 호문쿨루스에게 해답을 구하려고 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림8~11
그림 9. 독일 우표에 인쇄된 호문쿨루스, 메피스토펠레스 및 파우스트(1979년경)
그림 10.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인간 호문쿨루스(파우스트 1899년 판)
그림 11. 파우스트의 호문쿨루스(19세기 판화)
그림 12. 화가의 작품 속 호문쿨루스

철학과 정신에 대한 연구

영국의 철학자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의 책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1949)』에는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라일은 정신 활동이 육체적 활동과 별도로 구별되어 있다는 이원론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 이 문구를 사용했다. 라일은 물질적 세계와 인간의 마음은 단절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의하면 동물들 중 우리 인간만이 두 가지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신체도 가지고 있는 반면 동물들은 정신이 없는 기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을 라일은 기계 속의 유령이라고 비꼰 것이다.

확대 그림 13. 라일은『마음의 개념』 제 1장에서 이원론을 기계 속의 유령 이론이라고 명명하였다.

라일은『마음의 개념』 제 1장에서 그가 기계 속의 유령 이론이라고 부른 다음 주장들을 제시한 후 비판한다.(그림 12)

“인간은 몸과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구별되는 다른 종류의 실체들이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이고 시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마음은 비물리적이고 오직 시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두 실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존재하기를 중단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 상상가능하다 물리적 세계의 일부로서 우리의 몸은 모든 물리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은 물리적 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몸은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마음도 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 믿음과 욕구, 기분과 감정, 지각, 쾌락과 고통의 내용을 직접 인식한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의 내용을 직접 인식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추론할 뿐이다.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에 관해 그가 무언가를 믿고, 욕구하고, 기억하고, 즐거워하고, 불쾌해한다고 기술할 때,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의 내용에 관해 나는 오직 그의 행동과 말에서 추론할 수만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략 이것이 공식적인 이론이다. 나는 이것을 ‘기계 속의 유령 이론’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세부사항뿐만 아니라 그 원리에서부터 증명하고 싶다. 그것은 하나의 큰 실수이자 특별한 종류의 실수다. 즉, 범주의 오류다. 그것은 마음에 관한 사실들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마치 하나의 논리적 유형이나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론은 철학자들의 미신이다.”

그러나 우리 뇌에 호문클루스 같은 난쟁이는 없다. 우리 뇌는 뇌 안엔 신경세포들만 존재한다. 1000억 개나 되는 이 신경세포의 작용을 통해 우리가 사고하는 것이다.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정보는 다양한 신경세포에 분산되어 저장되고 처리된다고 한다.(그림13) 그러나 단순히 이 신경세포 각각의 기능과 역할만으로 인간의 의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밀라노 대학의 신경생리학자 마르첼로 마시미니는 뇌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모두 밝혀지더라도 뇌가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으로는 적절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마시미니는 이것을 고대 천문학자의 괴로움에 빗대어 “별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록하는 데 평생을 다 바쳐도, 그 움직임이 어떤 일반적인 법칙을 따르느냐는 알 수 없다.”고 말하며 뇌 과학의 어려움을 솔직히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