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정신의학의 역사

정신의학의 역사

20세기 전반 정신의학의 역사

작성일2023.08.31

20세기 전반 정신의학의 역사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미국의 정신의학은 통제 불능의 중증 정신병 환자를 시설에 수용하여 치료하는 것이 주 업무였습니다. 초기 정신과 진료는 정신병원(그리고 나중에는 주립병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들 기관에서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수(水)치료를 포함한 신체 요법, 전기경련요법 그리고 뇌엽절개술 같은 수술까지 광범위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무질서한 행동을 정신질환과 동일시하고 이러한 행동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신질환의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치료법이 환자의 의사에 반하여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치료법들은 나름 그 시대에 인정받던 합리적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치료법의 창시자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도 2명이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술을 한 의사들은 그들이 정신과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계는 임상의에게 과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진료를 수행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 중 가장 강력한 근거는 무작위대조시험입니다. 무작위대조시험은 1940년대 후반에 임상 의학에 도입되었고 정신과 연구자들은 1950년대에 처음으로 무작위대조시험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작위대조시험은 치료 효능 평가의 표준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정신의학의 경우 무작위대조시험의 도입은 치료 환경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기경련요법을 제외하고 20세기 전반부에 사용된 거의 모든 정신과 시술과 수술들은 폐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치료법들을 뒷받침했던 증거들은 더 이상 새로운 과학적 표준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작위대조시험의 등장이 의사가 이러한 치료법들을 포기한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확대 ▲ 그림 1. 1973년에 폐쇄된 매사추세츠주 그래프턴 주립병원의 복도. 한때 수천 명을 수용했던 정신병원은 이제 텅 비어 있고 방치되어 폐허로 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신의학 최초의 치료 약물인 항정신병 약물의 도입으로 생물학적 치료가 가능해졌습니다. 미국의 의사들은 1954년 초에 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의 첫 번째 선적을 받은 후에도 뇌엽절개술을 일차 치료로 고려하기는 했지만, 항정신병 약물을 시도해본 후 의사가 뇌엽절개술을 선택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약물을 통해 의사는 수술보다 더 쉽고 빠르게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환자의 정신병적 증상을 진정시키는 것이 가능했으며 정신병 환자를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치료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심리학적, 생물학적인 현대 정신의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치료법들은 나름 그 시대에 인정받던 합리적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치료법의 창시자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도 2명이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술을 한 의사들은 그들이 정신과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계는 임상의에게 과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진료를 수행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 중 가장 강력한 근거는 무작위대조시험입니다. 무작위대조시험은 1940년대 후반에 임상 의학에 도입되었고 정신과 연구자들은 1950년대에 처음으로 무작위대조시험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작위대조시험은 치료 효능 평가의 표준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정신의학의 경우 무작위대조시험의 도입은 치료 환경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기경련요법을 제외하고 20세기 전반부에 사용된 거의 모든 정신과 시술과 수술들은 폐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치료법들을 뒷받침했던 증거들은 더 이상 새로운 과학적 표준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작위대조시험의 등장이 의사가 이러한 치료법들을 포기한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수(水)치료

20세기 초에 가장 널리 인정받은 효과적인 신체요법은 수치료 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미국 전역의 주립병원에 도입된 이 치료법은 물을 사용하는 여러 장치를 활용하는 기술입니다. 가장 자주 사용되는 두 가지 형태의 수치료는 “연속 목욕continuous bath”과 “젖은 시트 팩wet sheet pack”이었습니다.

젖은 시트 팩은 정교한 장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시트를 약 4~38℃ 범위의 물에 적시고 환자를 이 젖은 시트로 단단하게 감쌌습니다. 동요가 심한 환자에게는 더 차가운 시트를 제공했고 허약한 환자에게는 비교적 따뜻한 시트가 제공되었습니다.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묶인 채로 있었습니다. 간병인은 종종 환자와 시트를 담요로 감싸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환자가 시트 팩을 거부하면 간병인은 세 번째 시트를 환자 위에 올려놓고 환자를 침대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환자들은 팩에 쌓여 있는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쳤습니다. 처음에는 차가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트 팩은 결국 뜨거워졌습니다. 의사는 보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젖은 시트를 고무 시트로 감싸도록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확대 ▲ 그림 2. 매사추세츠주 그래프턴에 있는 버려진 주립병원의 수치료실. 무거운 캔버스 덮개는 저항하는 환자를 물에 안전하게 담그고 머리만 구멍을 통해 돌출되도록 했다.

연속 목욕은 시트 팩보다 더 정교한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욕조는 대부분 물이 들어가는 입구와 물을 배출하는 출구가 있었습니다. 간병인은 환자를 해먹에 눕힌 다음 고정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간병인은 환자의 머리가 간신히 통과할 구멍이 있는 튼튼한 캔버스 시트로 욕조와 환자를 덮었습니다. 밸브와 온도 게이지를 통해 간병인은 온도와 물의 흐름을 모두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단일 치료 세션은 몇 시간에서부터 길면 며칠까지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치료법은 20세기 초 의사들에게 심각한 정신 질환 환자의 치료에 대한 진정한 치료 및 생물학적 접근법을 제공한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중재가 정신병 환자를 치료 및 제어하는 ​​데 특히 효과적인 수단임을 발견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정신병원의 의사들은 심하게 동요하는 환자를 진정시키는 다양한 약물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약물이 진정한 치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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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수치료실 전경. Pilgrim State Hospital, Brentwood, N.Y., 1938.

당시의 약물과는 대조적으로, 의사들은 수치료가 생물학적으로 환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과학적인 수단임을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수치료가 효과를 설명하는 다양한 실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는 이 치료법이 말초 혈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대뇌 울혈”을 완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Kellogg, 1887). 다른 사람들은 수치료가 정신 이상을 유발할 수 있는 “독성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Foster, 1899; Jagielski, 1896; Shepard, 1900).

한 의사는 수치료의 생리학을 설명하면서 “피부와 신장의 배설기능이 자극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Strecker, 1917). 혈압, 맥박, 호흡수 및 혈구 수치의 정확한 측정을 기반으로 하는 일련의 연구는 수치료의 과학을 뒷받침했습니다(Adler & Ragle, 1913; Niles, 1899; Peck, 1909).

의사들은 환자를 일상적으로 치료할 때 이러한 생리학적 근거를 사용했습니다. 1920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병원의 정신과 의사는 수치료를 남용한 혐의로 기소된 캘리포니아 주립병원을 대신하여 증언하면서 수치료가 “광기의 급성 흥분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치료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출판된 문헌에 근거하여 그는 생리학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팩은 피부를 통하여 신체 내부의 독성 물질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수치료는 혈류를 피부로 가져와 흥분을 유발하는 뇌와 척수의 울혈을 완화합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30~40년 동안 수치료의 과학적 신뢰도는 추락했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1940~1950년대를 거치며 처음에는 전기경련요법, 이후에는 항정신병 약물로 대체될 때까지 일반적으로 수치료를 많이 처방했습니다.

확대 ▲ 그림 4. 수치료는 장시간 이루어졌다. 수치료 중 간호사의 도움으로 식사 중인 환자. Pilgrim State Hospital, Brentwood, N.Y., 1938.

니치 독일의 불임정책과 T4 작전

당시 미국의 48개 주 중 40개 주는 1940년까지 그들의 강제 불임법을 제정할 예정이었지만, 캘리포니아처럼 적극적인 곳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종교 단체의 반대, 민주주의의 견제가 유사한 법률의 제정과 집행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나치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종적 “순수함”에 대한 아이디어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었습니다. 1920년대 저명한 독일 정신과 의사들은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그들은 정신질환자는 절망적이고 열등한 생물학적 표본이라는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 초부터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알프레트 오슈Alfred Hoche와 그의 동료이자 법학자인 칼 빈딩Karl Binding은 “살 가치가 없는 삶”의 억압을 요구했습니다.

집권 직후인 1933년 7월 히틀러는 캘리포니아와 버지니아의 선례를 모델로 한 유전병 예방법을 통과했습니다. 수많은 저명한 독일 정신과 의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1934년에서 1939년 사이에 300,000~400,000명의 사람들이 불임수술을 받았습니다.

확대 ▲ 그림 5. 히틀러의 T4 작전 명령서.

그런 다음 1939년 10월 히틀러는 소위 T-4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법령을 발표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정신과 의사들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데 열성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나치식 표현으로 “쓸모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들”로 불렸으며 한곳에 모아졌다가 이후 여러 정신병원으로 분산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소독”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독극물 주입이나 총격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이 방법이 너무 느리고 성가신 것으로 판명되자 “샤워실”에서 일산화탄소로 살해했습니다. 1년 반 동안 70,0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25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나치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점령국도 모르는 사이에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오염된 사람들”로 간주되는 환자들을 계속해서 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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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6. 18,000명 이상이 살해 당한 하르트하임Hartheim 안락사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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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 T-4 안락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하다마르Hadamar 안락사 센터의 직원들(1940).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힘든 하루를 보낸 후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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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8. 하다마르의 가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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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9. 희생자의 가족은 허위로 작성된 사망진단서를 받다.
거짓 사망 원인을 기록한 하다마르의 사망자 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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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0. 베를린 Tiergartenstraße 4에 있는 T4 작전 희생자 추모비

말라리아 열 치료

20세기 1/4분기에 3차 매독의 증상인 전신마비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였습니다. 매독은 매우 복잡한 질병으로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정신이상과 전신마비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항생제 사용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GPI(General Paralysis of the Insane)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는 것이 질병의 자연스러운 경과였습니다.

이 질병은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유병률도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일부 기관에서는 남성 환자의 최대 45%가 이 질병을 앓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미국 의사들은 역시 비슷한 수준의 마비 비율을 보고했습니다. 1910년대에 뉴욕주 정신병원에 처음 입원한 남성의 약 20%가 마비 진단을 받았으며 이 수치는 1925년까지 감소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마비로 입원할 가능성이 낮았고 입원률은 남성 환자의 약 1/3이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미국 전체 기관에서 처음 입원한 환자의 약 9%가 전신마비 진단을 받았습니다.

1917년 비엔나의 신경과 의사인 율리우스 바그너 폰 야우레크Julius Wagner von Jauregg는 양성 3차 말라리아에 감염된 혈액을 마비환자에게 주입하면 마비의 진행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일단 말라리아에 감염되면 폰 야우레크의 환자들은 일련의 발열(최대 41℃)과 오한을 경험했으며, 퀴닌으로 몇 주 치료받은 후에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마비에 대한 최초의 성공적인 치료법으로 인정받은 말라리아 열 치료법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졌고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정신질환에 대한 최초의 신체치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작위대조시험 도입 전 임상 과학의 표준인 사례 통제case control, 공개 시험open trial 및 임상 관찰clinical observation을 사용하여 수많은 연구자들이 폰 야우레크의 발견을 재현했습니다(Driver, Gammel, & Karnosh, 1926; Barnacle, Ebaugh, & Ewalt, 1936; Rose & Solomon, 1947). 과학자들은 말라리아 열 치료의 효능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동물실험을 통해 일부는 열 자체가 매독 스피로헤타를 파괴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Delgado, 1922; Schamberg & Rule, 1927), 다른 일부는 강화된 면역 반응을 통해 치료 효과를 설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Bennett, 1938b; Delgado, 1922; Solomon, 1923). 1927년 폰 야우레크는 최초의 정신과적 중재술 개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1944년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으나 1960년대 초반까지 의사들은 말라리아 열 치료를 계속 권장했습니다.

확대 ▲ 그림 11. 말라리아 감염 혈액의 주사를 감독하는 율리우스 바그너 폰 야우레크(1934). 말라리아 환자(배경)의 혈액이 3차 매독 환자(가운데)에게 주사되고 있다. 폰 야우레크는 매독 환자 바로 뒤에 서 있는 검은 재킷의 인물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말라리아 열 치료의 효과를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치료는 의사가 신경매독 환자를 대하는 방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치료법이 도입되기 전, 신경매독 환자에 대한 의사의 시각에는 매독에 걸린 개인을 부도덕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당시의 보편적인 문화적 가치가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완치가 불가능한 절망적 상황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들은 이 환자들에게 치료법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예기치 않게 신경매독에 걸린 사람들은 치료를 위해 자발적으로 주립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열 치료가 도입된 후 의사들은 환자를 더 동정적으로 여기고 치료 결정에 참여하도록 초대했습니다. 또한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면 의사는 환자의 의사에 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말라리아 열 치료 도입 이전과 달리 환자들은 자발적으로 말라리아 열 치료를 위해 자발적으로 입원했습니다. 위 사실을 종합하면 치료법이 생각보다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의사-환자 관계 및 의사가 환자를 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Braslow, 1995).

충격 요법

1930년대에 도입되었으며 “충격 요법shock therapy”으로 알려진 이 치료법들은 인슐린, 메트라졸Metrazol(pentylenetetrazol) 및 전기경련요법electroconvlusive therapy의 세 가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인슐린은 실제로 생리적 쇼크 상태를 일으키지만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두 치료법과 달랐고, 메트라졸과 전기는 대발작이나 경련을 일으키지만 생리적 쇼크는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후자의 두 가지 치료법은 경련 요법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인슐린과 메트라졸은 역사로 사라졌지만 전기경련요법은 현재도 정신의학에서 효과적인 치료 중 하나입니다.

1933년 11월 3일 만프레드 사켈Manfred Sakel은 비엔나 의사 학회에 인슐린 쇼크 치료(Insulinshockbehandlung)라고 하는 조현병에 대한 그의 새로운 치료법을 보고했습니다. 이는 심각한 저혈당 쇼크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인슐린을 투여하는 치료법입니다. 사켈은 1920년대 후반부터 진전 섬망 환자를 진정시키고 식욕을 개선하기 위해 저용량 인슐린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신병 환자들에게 저혈당 혼수상태를 유도하려고 시도한 것은 1930년대 초반이 되어서였습니다. 사켈과 그를 뒤이은 의사들은 이러한 혼수상태가 조현병 환자에게 특히 유익한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의사와 연구자들은 왜 인슐린 쇼크가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일관적이고 명확한 이론적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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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2. 1950년대 헬싱키 라핀라티 병원에서 인슐린 쇼크 치료 시술을 받는 환자.

수차례 수정을 거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방법은 혼수상태를 안정적으로 유도할 때까지 점진적으로 더 많은 양의 인슐린을 매일 주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환자는 이 혼수상태 용량으로 매일 주사를 맞았습니다. 이러한 치료는 비위관을 통해 설탕 용액을 투여하거나 정맥 포도당 용액을 투여하여 혼수상태에서 회복할 때까지 매일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인슐린 충격 요법은 50~60일 혼수를 유발한 후 종료되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소생시키기 직전에 환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절차는 매우 노동 집약적이었고 환자가 돌이킬 수 없는 혼수상태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간호사와 의사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저혈당성 뇌병증, 심부전, 흡인성 폐렴 및 뇌출혈과 같은 합병증으로 1~2%의 비율은 사망했습니다(Kinsey, 1941; U.S. Public Health Service, 1941).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치료는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41년 미국공중보건국 조사에서 305개 공공 및 사립기관 중 71%가 인슐린 쇼크 요법을 사용했다고 보고했습니다 (U.S. Public Health Service, 1941). 그러나 미 전역에 광범위한 적용은 오래가지 못하고 훨씬 더 관리하기 쉬운 전기경련요법으로 빠르게 대체되었습니다(Bennett, 1966).

전기경련요법은 라디슬라스 폰 메두나Ladislas von Meduna의 작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다페스트의 라디슬라스 폰 메두나는 “경련 상태와 조현병 과정 사이에 어떤 생화학적 길항작용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리하여 경련이 정신병을 개선한다고 생각하여 인위적으로 경련을 유도하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1934년 초 동물실험에서 그는 장뇌camphor의 근육 주사로 처음 경련을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메트라졸로 전환했습니다(Meduna, 1938). 이 새로운 치료법은 인슐린에 필적할 만큼 광범위하고 빠르게 수용되었습니다. 인슐린에 비해 메트라졸 치료는 치료 시간이 짧아 관찰이 덜 필요해 관리가 쉽고 합병증이 적습니다. 인슐린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의사는 조현병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메트라졸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이 되자 많은 연구자들이 정신병적 장애를 가진 환자보다 우울장애를 가진 환자에게 더 큰 효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Bennett, 193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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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3. 우고 세를레티는 로마의 도살장에서 전극으로 돼지를 기절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정신과 환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메트라졸 충격 요법의 성공을 인식한 이탈리아의 신경과 의사 우고 세를레티Ugo Cerletti와 그의 동료 루치오 비니Lucio Bini는 1936년에 정신병 환자에게 전기적으로 유도된 경련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 그들은 개를 대상으로 안전한 기술을 완성했고, 1938년 4월에 첫 인간에게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메트라졸이나 인슐린보다 합병증이 적고 시술 난이도가 낮은 전기경련요법은 빠르게 확산되어 결국 다른 두 충격 요법을 대체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1941년 미국공중보건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356개 정신과 기관 중 42%가 최초의 인체 실험 이후 3년 만에 전기충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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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4. 전기경련요법을 받는 환자의 모습. 루치오 비니가 환자의 마우스가드를 확인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주립병원 의사들이 전기경련요법을 환자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자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심리요법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주립병원 의사들은 두 가지 방식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믿고 많은 환자에게 심리요법과 전기 충격을 동시에 권장했습니다 (Gordon, 1948; Millet & Mosse, 1944; Selinsky, 1943).

뇌엽절개술

1950년대 이전에 도입된 모든 치료법들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시술이 뇌엽절개술입니다. 이 수술은 의사가 집도를 중단한 지 한참 후에야 가혹한 비판에 직면했습니다(Pressman, 1998; Valenstein, 1986). 그리고 뇌엽절개술은 당시에는 안정적인 과학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가장 핵심적 정당성은 예일의 신경생리학자 존 풀턴John Fulton의 연구실에서 나왔습니다.

풀턴은 1929년 생리학과장으로 임명된 이후로 전두엽 기능을 이해하는 데 많은 과학적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1935년 풀턴과 그의 젊은 동료인 칼라일 제이콥슨Carlisle Jacobson은 제2차 국제신경학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회의에는 포르투갈의 신경학자이자 뇌혈관조영술의 발명가인 에가스 모니스Egas Moniz도 참석했습니다. 모니스는 침팬지의 전두엽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여기서 알게 되었고, 풀턴과 제이콥슨의 발견을 자신의 뇌수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이후 모니스는 1936년에 첫 뇌엽절개술을 수행했습니다.

확대 ▲ 그림 15. 모니즈는 1949년 백질절개술의 치료적 가치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모니즈의 수술은 두개골 상단에 두 개의 구멍을 뚫은 다음 뇌의 전두엽 백질에 알코올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모니스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알코올 주사를 류코톰leukotome이라고 하는 장치로 대체했습니다. 이 장치는 막대 모양의 기구로 백질을 부수는 강철 루프가 있습니다. 이후에는 백질을 으스러뜨리는 대신 절단하는 밴드로 교체되었습니다. 이후 20년 동안 많은 외과의사들이 모니스의 수술법에 많은 변화를 고안해냈지만 모두 전두엽 백질섬유를 절단하는 데 기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뇌엽절개술이 뇌에 직접 작용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니스는 정신병리학적으로 백질 내 고정된 신경경로 때문에 정신병이 발병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전두엽의 섬유를 절단함으로써 이러한 병리적 연결이 붕괴되어 고정되지 않는 정상적인 패턴을 생성한다고 믿었습니다(Black, 1982; Damasio, 1975). 미국에서 뇌엽절개술의 주요 지지자인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은 뇌엽절개술의 효과가 시상과 전두엽 사이의 섬유를 절단하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시상이 병적인 감정을 관념 속에 주입하며 외과의사는 뇌엽절개술이 성공하려면 이 섬유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reeman & Watts, 1947).

확대 ▲ 그림 16. 다양한 형태의 변형 뇌엽절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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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7. 1948년 7월 8일 워싱턴 주의 병원에서 뇌엽절개술을 시행하는 프리먼. 얼음송곳을 환자의 뇌에 찔러 넣고 있다.

충격 요법과 달리 뇌엽절개술은 천천히 보급되었습니다. 1936년 프리먼과 제임스 와츠James Watts에 의해 미국에 도입되었지만, 뇌엽절개술이 황금기에 도달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이 느린 확산은 만성 조현병 환자에 대한 효과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Freeman & Watts, 1936). 모니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수술은 불안성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낮았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초 조현병에 대한 뇌엽절개술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Strecker, Palmer, & Grant, 1942)에 고무되어 주립병원 의사들은 조심스럽게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뇌엽절개술 건 수는 비교적 적은 수준으로 유지되었습니다. 1940년에서 1944년 사이에 의사들은 고작 684건의 뇌엽절개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뇌엽절개술의 시대가 왔습니다. 수술을 가능한 많은 주립병원으로 확대하려는 프리먼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힘입어 1949년까지 의사들은 한 해에 5,000명의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모니스는 뇌엽절개술에 대한 연구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풀턴의 연구과 그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뇌엽절개술의 수용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Fulton, 1951, 1956; Pressman, 1988, 1998). 그리하여 1951년이 되자 미국에서는 연간 총 20,000건에 가까운 뇌엽절개술이 시행되었습니다(Kramer, 1954). 하지만 수술의 인기는 급격하게 오른 만큼 빨리 식어버렸습니다. 1954년 항정신병 약물인 클로르프로마진이 도입된 후 의사들은 이 새로운 약물을 환영하며 재빨리 수술을 포기했고 1960년이 되자 의사들은 거의 수술을 하지 않았습니다(Barahal, 1958; Robin, 1958).

뇌엽절개술을 시행한 의사들은 시대의 잘못된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이 해석은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 의사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한 딜레마에 비추어 평가할 때 너무 단순합니다. 뇌엽절개술사lobotomist라는 단어가 비정상적으로 가학적이거나 망상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의사들의 일상적 경험을 조사하면 어떻게 과학, 지역적 상황, 사회적 요구 사항이 의사가 치료 효과를 평가하는 데 영향을 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과밀하고 인력이 부족한 주립병원 의사들에게 뇌엽절개술은 가장 병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과학적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뇌엽절개술은 극단적인 치료법임이 분명하지만 의사들은 이를 명백한 과학적 절차로 보았습니다. 뇌엽절개술은 환자의 불안한 행동을 성공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료의 효과에 대한 의사의 믿음을 재확인 시켰습니다.

주립병원의 과밀화라는 지역적 상황이 의사가 의료의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고려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의했습니다. 과학적 증거와 결합된 지역적 맥락이 치료의 효과에 대한 의사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수술 후 냉담하고 무관심해진 환자가 부적절한 신경학적 후유증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치료 효과의 증거로 보였는지는 의사가 처한 상황에 달려 있었습니다.

행동 통제가 치료적 성공을 측정하는 주립 병원에서 의사들은 이 잘 알려진 결과를 수술의 원치 않는 결과로 볼 가능성이 적었습니다 (Aldrich, 1950; Cohen, Novick, & Ettleson, 1942; Ewald, Freeman, & Watts, 1947; Freeman & Watts, 1937). 1954년 임상증례회의에서 최근에 뇌엽절제술을 받은 환자의 경과를 병동의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눈을 통한 뇌엽절개술 후 유익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수술이 그를 도왔다는 것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는 둔하고 다소 냉담합니다. 모든 질문을 한 단어로만 대답합니다.” 환자의 무관심은 성공적인 치료 성과를 무효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치료 효과의 전제 조건으로도 여겨졌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병원의 한 의사는 “아마도 무관심이 그들을 치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적 증거는 특정 치료법을 사용하고 효과가 있는지 여부를 평가하기 위한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지만, 뇌엽절개술의 운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유일한 결정 요인은 아닙니다. 1950년대 중반, 의사들은 갑자기 클로르프로마진에 환호하여 뇌엽절개술을 포기했습니다. 클로르프로마진의 인기 급상승(1955년까지 미국에서 2백만 건 이상의 처방이 작성됨)과 뇌엽절개술의 급속한 감소는 과학적 증거와 거의 관련이 없었습니다(Feyhan, 1955; Freeman, 1958).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많은 대규모 연구에서 뇌엽절개술의 효능이 의심을 받기 시작했고, 대규모 무작위대조시험에서 클로르프로마진의 효능이 입증된 것은 1960년대 초반이 되어서였습니다(Psychopharmacology Service Center, 1964; Casey, Lasky , Klett, & Hoilister, 1960). 의사들은 뇌엽절개술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용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립병원의 상황을 고려할 때 클로르프로마진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 뿐 입니다.

헨리 코튼의 발치술과 복부수술

20세기 초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인 헨리 코튼Henry Cotton은 정신질환의 생물학적 기반을 과대하게 추구, 수천 명의 환자를 불구로 만들거나 사망하게 했습니다.

확대 ▲ 그림 18. 1932년의 헨리 코튼.

헨리 코튼은 1899년에 메릴랜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메사추세츠주 우스터 주립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의사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코튼은 야망은 의사 생활을 초반부터 드러냈습니다. 우스터에서 상사였던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는 코튼이 정신의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높은 자리에 오를 계획에 대해 말했다고 회상했습니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는 뮌헨에서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과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와 함께 연구했습니다.

의학 엘리트 중 한 명이자 당시 신경정신의학 분야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와 아돌프 마이어의 제자였던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1907년 뉴저지주 트렌튼 주립 병원의 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코튼은 즉시 트렌턴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꾀했습니다. 환자에 대한 기계적 구속을 폐지하고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교육 과정을 신설했습니다. 환자에 대한 직원 폭력 예방을 위해 노력했고 시설의 안전 개선, 직원 대 환자 비율 개선에 노력했고 작업치료 과정도 신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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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9. 병원의 판화(19세기 중반)

많은 질병의 세균학적 근거가 발견되면서 일반 의학과 외과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의학에서는 이에 비교할 만한 과학적 돌파구가 없었습니다. 임명 직후 코튼은 모든 정신장애가 숨겨진 감염에 의해 유발된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일반 의학계에서 신체 질환의 원인으로 “국소 패혈증”을 연구하는 것이 매우 유행했습니다. 코튼은 정신과 의사로 이 의료 주류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13년 매독을 유발하는 스피로헤타가 마비와 정신병적 증상을 유발하는 뇌 병변의 원인이라는 보고를 들은 이후, 코튼은 “광기의 세균학적 모델” 가설을 세우고 국소 패혈증 이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코튼은 조현병 및 기타 정신질환의 치료는 감염원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감염 부위를 찾아 제거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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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0. 헨리 코튼의 국소감염이론을 담은 기사, 뉴욕 트리뷴, 1918년 10월 23일.

코튼은 신속하게 감염 위험을 근절하기 위해 공격적인 수술을 채택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감염이 환자의 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환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감염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무자비한 외과적 제제를 시작했습니다. 코튼은 50명의 환자의 치아를 제거하는 것으로 실험 치료를 시작했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은 후 치료를 편도선 절제술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높은 치료 효과를 보았다고 확신하고 보았다고 국소 감염이론의 진정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위장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비장, 담낭, 맹장을 제거하고 마지막에서는 결장 전체를 제거했습니다. 자궁경부, 자궁, 난소를 상실한 여성이 계속해서 회복되지 않을 경우 직장 절제술까지 시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코튼은 환자 동의를 받지 않거나 환자 가족의 의사에 반하여 수술하기도 했습니다.

초기에 코튼은 자신의 치료에 대한 놀라운 성공률을 주장하여 미국 정신의학 협회 회의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문헌을 출판했습니다. 코튼은 트렌턴의 정신분열증, 조울증 및 경도 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645회의 결장절제술을 수행했습니다. 코튼은 80% 이상의 놀라운 성공률을 주장했지만 25~30%의 사망률도 인정했습니다. 그 책임은 만성 정신병 환자의 쇠약한 건강 상태로 돌렸습니다. 결장절제술은 사망률이 40%를 초과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그러한 과감한 외과적 개입을 “보존적 예방 조치”라고 설명했으며, “위는 대장과 함께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중요하지 않은 기관 중 하나”라고 천진난만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비판에 직면할 때면 맹렬하게 호전성을 드러내며 싸웠습니다. 코튼는 이 메시아적 열성으로 자기 홍보를 지속했습니다.

확대 ▲ 그림 21. 코튼이 출판한 책에 수록된 치아가 제거된 환자 구강그림.

결과적으로 동료 정신과 의사들은 이 기적적인 새로운 치료법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트렌튼으로 모여 들었고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정신장애가 있는 가족을 병원에 데려왔습니다.

그의 불량한 수술 성적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그를 정신의학계 영웅으로 대접했고 영국을 수차례 방문하여 권위 있는 학회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코튼에게 수여된 최고의 영예 중 하나는 1922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연을 하도록 초청받은 것이었고, 이 강연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만Thomas Mann,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등 당시의 저명한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습니다.

확대 ▲ 그림 22. 감염 병소(Foci of infection): 코튼이 반복적으로 사용한 차트.
병소에는 감염이 감지되지 않고 숨어 신체와 뇌를 교활하게 중독시키는 신체의 모든 구석과 틈이 표시돼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코튼의 발표에 감명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신과 학계에서는 코튼이 데이터를 은폐하는 것으로 의심된다며 코튼의 결론을 신뢰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코튼의 동료들도 그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코튼은 동료 심사 학술지에 많은 논문을 발표했지만 대중 매체를 통한 자기 홍보에 더 열을 올리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트렌튼의 병동에는 치아가 없는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환자들은 수척하고 영양 부족 상태에서 반복되는 수술을 면하기 위해 애원했으나 수술실로 끌려갔습니다.

1920년대 초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코튼의 스승인 마이어에게 조사가 의뢰되었습니다. 마이어는 자신의 제자 필리스 그린에이커Phyllis Greenacre를 병원으로 보내 과거 진료기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실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만나보게 했습니다. 코튼과 그의 동료들의 엄청난 저항과 적대감을 이겨낸 끝에 얻어낸 그녀의 결론은 참혹했습니다. 1년 6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그린에이커는 코튼의 국소 감염에 근거한 수술법이 지나치게 사망률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치료율이 80% 이상이라는 코튼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수술 후 6명중 1명이 사망했고, 40퍼센트는 수술을 받고도 개선이 없거나 후유증 때문에 퇴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치료법의 긍정적 효과를 입증할 증거가 사실상 전무하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코튼은 조사 결과를 받고 분노했고, 생물정신의학을 주창하던 마이어도 이 보고서를 채택해서 공표할 경우 발생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보고서는 유야무야되었고, 그린에이커도 다른 도시로 취직하면서 이 모든 조사 결과는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코튼은 1920년대 후반 개인진료를 통해 얻은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주 당국과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굳이 비밀로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당국도 몇 년 동안 눈을 감아주다가 경제 불황이 오자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풀타임 정규직 공무원이 어떻게 겸업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코튼의 연구 성과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문제들과 함께 결국 1930년 10월 1일에 그가 직위에서 해제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명예 연구책임자 지위를 유지했고 트렌턴에서 임상 연구는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코튼은 좌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렌튼의 새로운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원들이 발치와 결장절제술을 꺼리는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자신의 치료 방식을 되찾기 위해 주정부에 로비를 지속 했습니다. 자신의 개인병원에서 코튼은 수술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그의 기술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그는 또한 복부수술을 전에 전체 치아를 발치해야한다고 더욱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시기에 뉴저지주 기관 및 단체국 조사실장인 에밀 프랭클Emil Frankel이 코튼의 관행에 대한 세 번째 조사를 수행했습니다. 조사결과 코튼이 발표한 통계에 상당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결장절제술을 받은 309명의 환자 중 회복 환자는 코튼이 발표한 대로 75명이 아니라 겨우 22명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수술을 받은 309명 중 138명이 사망했고, 101명이 여전히 입원치료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랭클의 보고서는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헨리 코튼은 끝까지 처벌받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1933년 5월 사망했습니다. 코튼의 사후에 그의 후계자들은 복부수술은 포기했지만 열의를 다해 다른 외과적 치료를 계속했으며 1960년까지 치아를 뽑는 치료는 계속 되었습니다. 코튼과 그의 조수들은 약 11,000개 이상의 치아를 뽑았으며 645건의 수술을 수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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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3. 헨리 코튼의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가
사회학자 앤드류 스컬가 발굴해 책으로 출판했다.

결론

1950년대 이전에 도입된 거의 모든 정신과 치료(전기경련치료 제외)가 포기되었지만 이 글의 목적은 정신의학의 실패를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 및 치료 관행은 시간, 장소 및 문화의 제약을 받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 역사는 합리적 과학을 기반으로 한 치료가 시간과 장소에 얼마나 의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늘날 증거를 기반으로 한 의학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첫째, 우리는 많은 과학적, 치료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모든 세대는 그들이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으나, 이 역사가 보여주듯이 증거로 간주되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합니다. 둘째, 우리가 근거를 발견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현대적인 방법론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역사가 지침이 된다면 이러한 방법은 틀림없이 수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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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4.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바이베리 주립병원의 남성 병동.
이 병원의 이미지들은 1944년 간병인으로 일하게 된 퀘이커 교도이며 양심적 병역 거부자인 챨스 로드가 은밀히 촬영했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또한 어려운 윤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뇌엽절개술과 같은 처우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심각한 정신 질환자를 치료하려 시도한 과학과 선의가 그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의사들을 너무 가혹하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시도는 당시 합법적인 현대과학에 근간을 두었습니다. 또한, 의사들은 이 치료법이 사회 및 문화적 맥락 내에서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임상에서 우리가 치료의 효과를 판단하는 방식도 바뀌었고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기준도 상향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의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1. Braslow JT. Mental Ills and Bodily Cures: Psychiatric Treatment in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2. Scull A. Madness in civilization: a cultural history of insanity from the Bible to Freud, and from the madhouse to modern medicine. London (UK): Thames and Hudson; and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