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DLAM 1946

앨버트 Q. 메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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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DLAM 1946

작성일2020.11.26

BEDLAM 1946
금정형주요양병원 진료과장 송 강

미국 정신병원 대부분은 수치와 망신의 대상이다.

앨버트 Q. 메이즐

이 기사의 쓴 메이즐은 그간의 저작들과 의회 증언을 통해 재향군인관리국 산하 정신병원의 중요한 개선 사항들을 조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오하이오 주 사진들은 오하이오 주 복지국장 프레이저 림스의 허락, 국가 정신보건 위원회 산하 오하이오 주 정신보건협회의 협조를 얻어 제리 쿡이 촬영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가 노후화되고 직원이 부족한 과잉 수용 정신 “병원”인 바이베리 병원을 유지하고 있다. “지하 감옥”으로 알려진 지하 병동의 석벽에는 지금도 “1937년 조지가 살해당했다.”라는 말이 지금도 새겨져 있다. 이 한심한 기념 문구는 미국 북부 연방의 거의 모든 주에 있는 정신건강 시설에 있었던 다른 조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대중의 무관심과 의회의 예산 할당 부족으로 각 주들은 주의 시설들이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나치의 벨젠 강제 수용소과 거의 비슷한 상태에 빠지도록 방치했다.
법원과 대배심 기록 문서들에 따르면 정신병원 간수들의 구타로 수십 명이 사망했다. 거의 살인에 버금가는 학대를 당한 사람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또한, 믿을만한 증거에 따르면 이런 기록들은 매일 매일 일어나는 구타의 매우 적은 부분만을 담은 것이었으며, 이런 행위들은 서로를 보호해주는 침묵을 공모함으로써 은폐되었으며, “너무 크게 노래하는”이라는 암호로 불린 직원들을 추방하는 형태로 역시 은폐됐다.
하지만 구타와 살인은 180개 이상의 주립 정신시설에 40만 명에 이르는 죄 없는 환자 겸 죄수 대부분에게 가해진 가혹행위에 비하면 큰 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가장 좋은 음식은 병원 직원 식당용으로 빼놓기 때문에 수천 명의 수용자들은 낮은 예산 기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굶주림을 간신히 면할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을 제공받는다. 우리는 남성, 여성, 때로는 어린이들까지도 100년 된 오래된 병동에 몰아넣는다. 이 병동에는 너무나 사람이 많아 삐걱거리는 병상들 사이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며, 또 다른 수천 명은 얇은 천, 담요 또는 맨바닥에서 잠을 잔다. 우리는 그들에게 옷을 주지 않거나 준다고 해도 조잡한 옷을 준다. 내가 아는 바 또는 내가 본 바에 따르면 24시간 내내 더러운 알몸 상태로 지내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다. 이런 시설들에는 몇 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하루에 12시간 동안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한 정신병원에 있던 한 남자도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 식으로 19년을 일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부분 한 번에 몇 주씩 좋게 말해서 “제한 도구들”에 구속된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 두꺼운 가죽 수갑, 캔버스 천으로 만든 캐미솔, “구속용 팔 토시”, “벙어리 장갑”, 수갑, 자물쇠와 끈, 구속 침대 등이다. 수백 명이 “로지(lodge)”에 감금된다. 로지는 배설물과 쓰레기들로 가득 찬 침대 없는 방으로, 낮에는 철창의 지름 1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으로 빛이 겨우 들어오고, 밤에는 정신병원 벽을 넘지 못하는, 미친 사람들의 울부짖음 소리만 들리는 곳이다.
가장 나쁜 것은 이런 병동들에 우리가 제공하는 의사, 간호사, 간수의 수가 주 정부가 정한 기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다. 과잉수용은 아니더라도 심각하게 직원이 부족한 시설들은 처음 지어질 때 정해진 수용 용량의 30%, 50%, 100%까지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한다. 이런 상황은 전시 상황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상황이다. 환자들에 대한 구속, 격리, 지속적인 약물 투여는 간수 한 명이 최대 400명을 책임져야 하는 병동에서 필수적인 과정이 되었다.
전쟁 전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유능한 직원을 구하기에는 월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병원 의료진은 (몇몇 중요한 예외를 빼면) 치료를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보호 감독 수준에 머물렀고, 한 주지사는 이 상황에 대해 “병원 헛간에 있는 소들이 병동 환자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고까지 말했다. 따라서 사회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지옥에서 머물면서, 학대 당하고, 구타 당하고, 약물을 투여 당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방치되는 사람들에게 더 빨리 오는 해방을 원하게 됐다. 에를 들어, 일부 정신병원에서는 결핵 환자 비율이 일반인들의 평균 비율의 13배나 된다.
이런 환경은 전시의 인력 부족 결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오래 지속되는 약점들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병원은 인력이 부족했다. 병원 일정이 빡빡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진주만 공격 1년 전에도 이미 우리는 36만519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들에 40만4293명을 수용했다.
이런 끔찍한 상황 중 어떤 것도 “보편적인 관행” 또는 “미친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일부 주들은 과잉수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어떤 주들은 치료된 사람이나 상태가 호전된 사람을 다른 주들보다 3~4배 비율로 석방하기도 한다. 아주 작은 주인 델라웨어 주 같은 주들은 충분하거나 거의 충분한 수의 의사, 간호사, 간수들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각 주에서도 일부 뛰어난 정신병원장들은 월급에 적고 업무는 과중하지만 시설의 수준을 적절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기발한 능력, 지도력, 열심히 일을 함을 통해서 일부 병원들은 구타에 대처하고 구속 장치들과 독방 감금을 줄이는데 성공했고, 어두운 시대의 유물들을 제거하는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슬프고 놀라운 사실은 이런 예외적인 경우들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립 정신병원들 대부분은 공포스럽고, 낙후돼 있다. 이 병원들은 주에서 가장 도움을 받지 못하는 병동들에 대해 주 정부가 책임을 방기한 기념비적인 예다.
이런 상황은 어떤 한 사람이 관찰한 결과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12개 병원에서 내가 관찰한 결과, 법원 기록과 수사 기록 외에도, 워싱턴 주에서 버지니아 주까지, 메인 주에서 유타 주까지 모든 주립 정신병원의 거의 3분의 1에 관한 믿을만한 대규모 데이터를 이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전쟁 때문에 고질적인 인력 부족 사태가 더 악화됨에 따라 양심적인 병역거부자 3000명 이상이 선택 복무제라는 이름 하에 정신병원 간수로 자원했다. 이들 대부분은 선택 복무제 당국의 승인을 받아 지금도 복무를 하고 있으며, 이 젊고 심각한 감리교 신자들, 퀘이커 교도들, 메노파 형제회 교도들은 정신병원 작원들을 위한 지침서를 준비하면서 설문조사에 응답하고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
이 젊은이들이 병역 대신에 어렵고 인기 없는 일을 하도록 만든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이 배속된 병원에서 일할 때 본 것들을 기술하는 정직함과 진지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공식 데이터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만, 이들의 기록은 거의 모든 주의 정신병원 시스템을 대폭 개혁해야 한다는데 전혀 의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환자에 대한 충격적인 가혹행위와 신체 학대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음과 같은 뉴욕 주 주립병원에 관한 한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증언에 따르면 이 4명의 간수는 최대한 세게 환자들의 얼굴을 때렸고, 주먹으로 갈비뼈를 갈겼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발길질을 당한 환자들도 있었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 간수 하나는 주먹으로 환자 뒤통수를 때리는 버릇이 있었다. 한 번은 이 간수가 환자에게 손을 의자에 대라고 한 뒤 열쇠 꾸러미로 손가락을 내리친 적도 있었다.”
아이오와 주의 한 주립병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고됐다.
“간수는 자신을 목 졸랐던 환자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주로 등을 찼지만, 목 뒤도 몇 번 걷어찼고, 생식기 부위를 차자 환자는 비명을 지르면 고통 속에서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모두 합쳐 20번 이상은 찬 것 같다. 결국 환자는 질질 끌려서 독방에 갇혔다. 간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간수는 ‘별일 아니오. 저런 놈은 죽어 마땅하지.’라고 말했다. 피해자에게는 수갑이 채워졌고, 그 상태로 며칠이 지났다. 계속 수갑이 을 차고 있었다.”
오하이오 주 주립병원에 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환자들을 보면서 간수와 함께 베란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환자 한 명이 빗질을 하면서 우리쪽으로 오고 있었고, 간수는 이 환자가 빗질을 할 수 있도록 벤치에서 일어나라고 다른 환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환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간수는 벌떡 일어나 2센티미터 너비의 구속 채찍으로 이 환자의 얼굴과 머리를 때리기 시작하면서 말했다. ‘일어나라고, 이 자식아!’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몇 분 후 간수는 이 환자가 허리가 벤치에 묶여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예들은 국립 정신건강 재단에 있는 수백 건이 넘는 기록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기록들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투쟁의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신문과 법정 기록에서 보이는 수많은 예들을 보면 이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7월 6일 미주리 주 네바다의 한 주립병원은 코델 험프리라는 환자의 사망 사건 때문에 조사를 받았다. 미주리주 카티지의 밴 어크 박사가 시행한 검시에 따르면 험프리는 죽기 전에 짧은 시간 동안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팔, 다리, 가슴, 배, 머리에 자국이 있으며, 사망을 일으킨 것은 뇌의 부상”라고 밴 어크 박사는 분석했다. 이 사고의 결과로 간수 매시 클로닝거는 주립 교도소 5년 형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의 간수는 폭행 혐의로 재판 대기 중이다.
지난 2월 네바다 주 헤이스팅스에서는 주립병원의 간수였던 윌리엄 L 스켈턴이 환자 앨프레드 T 앤더슨 사망 사건과 관련해 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스켈턴은 다른 간수가 앤더슨을 첼제 곤봉으로 구타할 때 앤더슨을 잡아 앉힌 혐의를 받고 있다.
1941년 코네티컷 주의 페어필드 주립병원 간수 5명은 환자를 구타 사건 2건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됐다. 이 과정에서 환자 한 명이 사망했다. 이 두 간수는 살인과 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2년 초에는 미들타운 주립병원에서 환자 5명을 학대한 혐의로 간수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 간수 중 한 명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 결과로 공공복지위원회와 미국 공공건강서비스는 코네티컷 주 정신병원들에 대한 철저한 전수 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지난 11월에도 페어필드 주립병원에 대해서는 관리 소홀 문제가 제기돼 정신병원 원장이 사임하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병원 경영진은 코네티컷 주를 비롯해 다른 어느 곳에서도 구타를 용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 경영진은 구타를 저지른 간수들의 유죄 판결을 이끌기보다는 권고를 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간수를 내보내는 수준에 만족하게 됐다. 이런 간수들이 다른 주의 병원이나, 심지어는 같은 주으ㅏ 다른 정신병원으로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예는 지난해 클리블랜드에서 관찰됐다. 간수 아론 코플리는 폭행과 구타 혐의로 지역 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코플리는 자신이 “희생양”이며 가혹행위는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흔하게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간수 3명의 구타 7건에 대해 고발을 했다. 법원 보호관찰관은 고발에 대해 조사를 하는 괴정에서, 코플리가 고발한 간수 중 한 명인 헌터가 방화 전과를 가지고 있으며 재향군인관리국 산하 메릴랜드 주 페리포인트 정신병원에 수감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런 기록에도 불구하고 일주일만에 헌터는 보호 관찰관의 편지 몇 통으로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일자리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다시 의심스러운 “사고들”이 헌터에 의해 일어났지만 그는 계속 일자리를 유지했다. 이 병원은 헌터의 성격과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지독한 박봉을 받는 병원 직원들이 자신들이 두려워하고 멸시하는 수백 명의 환자들을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은 극단적인 결과로 구타가 발생한 것이다. 구타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발생한 것은 구속 장비들을 이용한 잔혹 행위였다. 일부 병원들은 신체적 구속 장비들을 완전히 없앴고, 또 다른 병원들은 의사의 문서 허가가 있어야 구속 장비들을 쓸 수 있게 만들었지만, 이미 널리 퍼진 관행은 시달리고 공포에 찬 간수들이 환자를 구속하거나 독방에 가둘 수 있도록 계속 만들고 있다.
1942년 코네티컷 주 병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그해 2월 노위치 주립병원에서 환자 16명이 구속을 당하고 32명이 독방에 갇혔다. 조사관들은 이 조사결과에 개탄하면서 “이런 방법의 사용은 대폭 줄어야 한다”는 신성한 희망을 표명했다. 하지만 1945년의 한 달 동안에도, 양심적 병역거부자 2명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병원의 환자 26명이 캔버스 천, 벙어리장갑, 침대 시트에 묶여 6552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80명은 독방에서 1만3900 시간을 보냈다.
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간수는 뉴욕 주 주립병원에 대한 보고서에서 구속 장치들이 남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몇 달 동안 구속 장치에 묶여 있던 E. E.라는 환자가 있었다. 하루에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A. H.라는 환자는 한 달이 넘도록 캐미솔에 갇혀 있었고, 캐미솔을 벗는 유일한 경우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할 때뿐이었다.”라고 썼다.
페실베이니아 주의 정신건강국은 1925년 이래 구속 장비를 제한하는 명령을 반복적으로 내여왔다. 이론적으로는, 이 명령에 따르면 구속 장비는 “의사의 문서 허가에 의해서만 특정한 기간 동안만 사용되어애 한다.” 이론적으로는, 구속 장비의 사용 내역은 모두 자세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하지만 1944년 8월 펜실베이니아 병원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간수 30명의 회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침대 시트를 이용한 구속은 상당히 많이 시행되지만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다. 물 요법(여성)을 하는 첫날 오전에는 보통 환자들의 손을 머리 위로 묶는다. 이렇게 하면 구속 장비를 제거해도 팔이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수건은 일시적인 구속을 위해 남성과 여성의 허리를 묶는데 사용된다. 수갑과 끈은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모든 구속 장비와 결합돼 사용된다. 시트는 발목, 목, 가슴을 침대, 벤치, 의자에 묶는 데 사용된다. 이런 경우 충분한 감독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손과 발이 부을 때가 많다.”
“기록에 의하면 따르면 구속 장치에 묶여 있는 사람은 평균 38명 이상이다. 실제로 구속 장치에 묶여 있는 사람의 수가 기록된 수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 한 간수가 일한 7개월 동안 그 간수의 병동에서 같은 기간 동안 묶여 있었던 사람들도 있다. 의사들이 방치한 채 여성 병동에 몇 주, 몇 달 동안 묶여 있었던 사람들도 있다. ‘의사들이 계단을 올라가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개화된” 병원들에서는 간수들이 문제를 덜 일으키도록 화학적 구속 방법(즉, 약물)로 환자들을 통제했다. 이론적으로, 이 약물들은 의사나 등록된 간호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투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병동에 일괄적으로 보내져 교육받지 않은 간수들 재량으로 투여됐다. 또 다른 펜실베이니아 주립병원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기록(같은 병동의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도 같은 기록을 남겼다)은 이렇게 약물이 “자유롭게” 투여된 결과를 잘 보여준다.
“L은 25세 정도의 청년이었다. 너무 행동이 빠르고 몸이 강해서 제압하기가 매우 힘든 환자였다. L은 3시간마다 한 번씩 진정제(페노바르비탈나트륨)을 투여받았다. 얼마 뒤, 내가 의사에게 항의하자 진정제 투여는 중단됐고, 의사는 이 청년을 구하기 위해 심각하게 노력을 했다. 나는 이 청년의 진정제 투여 기록을 복사했다. 108 시간 동안 그에게 최소 90 그레인의 페노바르비탈나트륨을 투여됐고, 이는 약물 과다 투여나 히오신 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맞은 몇 번은 열이 있을 때 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정제를 너무 많아 맞았고, 결국 사망했다.”

과로가 부른 가혹행위

거의 끝없이 이어지는 이런 예들을 연구하면, 한 편의 학대와 가혹행위 다른 한 편의 저임금, 긴 근무시간, 과잉수용 사이의 상관관계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에를 들어, 펜실베이니아 주 워렌의 한 병원의 수용 한계는 2074명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병원에 거주하는 일일 평균 환자 수는 2560명이다. 23% 초과 수용이다. 등록 직원 수는 500명이다. 하지만 최근 몇 달 동안 실제 평균 직원 수는 371명이었다. 의사 수는 4명, 즉 환자 640명 당 의사 1명이다. 공식적으로 12시간을 근무하면서 어느 정도 진료 수준을 유지하려면 의사는 18~25명이 있어야 한다. (전쟁 오래전부터 계속된) 이런 인원 부족의 “비밀”은 직원의 임금 체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 주립병원들의 간수들은 연봉 900 달러에 못 미치는 본봉에 유지비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주의 교도소 간수들은 연봉 1950달러에 유지비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신병원 간수의 일이 교도소 간수의 일보다 이 더 위험하고 열악한 일인데도 그렇다. 문제는 펜실베이니아 주보다 더한 곳도 있다는 것이다. 로드아일랜드 주 하워드에 있는 주립병원은 1945년 12월 13일 현재 간수 자리가 약 200명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간수들의 초봉은 한달에 55달러에 유지비였다.
아이오와 주 체로키 주립병원의 등록된 환자 수용 가능 인원은 1200명이다. 1945년 12월 20일 현재 실제 수용 인원은 1725명이었다. “예산에 책정된” 간호사는 20명이지만 실제로 일하는 간호사는 2명이다. 예산에 책정된 간수는 130명이지만 실제로 고용된 간수는 62명에 불과했다. 간수들의 초봉은 한 달에 65달러다.
임금만 적게 준 것이 아니었다. 예산 부족과 지원 부족으로 수십, 수백 개 병원들은 최소한의 건물 유지도 할 수 없었다. 버지니아 주의 한 주립병원에 관한 다음의 보고서를 살펴보자.
“병동과 노인 병동에는 샤워 시설이 없다. 환자는 65명 정도 되는데 욕조는 2개밖에 없다. 욕실 하나에서는 파이프에서 더러운 물이 새어 나와 욕조 안에서 목욕을 하는 환자들, 환자들을 목욕시키는 간수들의 머리에 떨어진다.”
뉴욕의 주립병원으로부터 온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41병동에는 더 지저분하고 정신장애가 심한 환자들이 있다. 이들은 툭하면 유리창을 부순다. 여름에는 깨진 창문을 교체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져도 창문은 교체되지 않았다. 2주 동안 우리 간수들은 관리자에게 이 사실을 말했지만, 그는 창문을 교체할 필요가 없다고 무시하면서, 창문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가서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음식에 드는 비용을 아끼는 경우도 있다. 1940년 미국 전역의 정신병원 내 환자들이 소비하는 음식의 평균 비용은 하루에 23.3센트였다. 하루에 17센트밖에 쓰지 않은 병원들도 있었다. 뉴욕처럼 물가가 높은 주도 하루에 26.8센트밖에는 지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이 숫자들은 병원 내 농장에서 환자들이 재배한 식량을 포함하고 있었다.
조사자들은 정신병원 영양사들이 병원 기록으로 남긴 그럴듯한 메뉴에 속는 경우가 많다. 이 메뉴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는 코네티컷 주립병원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간수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44년 8월 어느 아침의 일이다. 환자들의 정해진 아침 메뉴는 몰텍스(맥아추출 곡물)과 달걀 반숙이었지만, 환자들이 받은 것은 몰텍스뿐이었다. 그날 밤 메뉴는 “마카로니, 토마토, 치즈”였지만 실제로 환자들이 받는 것은 리마콩 수프였다. 며칠 후 아침은 “오렌지 반쪽, 옥수수가루, 달걀 스크램블”이었지만 환자들이 먹은 것은 옥수수가루뿐이었다. 그날 저녁은 “소고기 스튜, 건포도를 곁들인 찐 쌀”이었지만, 환자들이 받은 것은 소시지, 호박, 감자였다. 저녁 메뉴로 예정된 “찐 콩과 콜슬로(양배추 샐러드)” 대신 콩 수프만 받기도 했다.
뉴저지 주의 주립병원에 대해서 한 간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매일 보는 것 중의 최악은 음식 접시들이 쓰레기통에 흔히 있는 버려진 접시들과 같은 것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콜슬로 샐러드는 식탁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환자들은 동물처럼 그것들을 주워 먹었다. 식탁, 의자, 바닥에는 전에 먹었던 음식의 찌꺼기들이 널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환자들이 먹는 음식은 제일 좋은 음식들을 병원 직원들이 가져감으로써 더욱 질이 안 좋아졌다. 1945년 8월의 어느 화요일, 펜실베이니아 주립병원 의사들의 저녁 메뉴는 “그레이비를 곁들인 최고급 갈비구이, 삶은 토마토, 구운 옥수수를 곁들인 빵, 빵(흰 빵, 통밀가루 빵, 호밀 또는 건포도 빵)과 버터, 오이 샐러드, 상추와 셀러리, 사과-살구 파이와 커피, 차, 아이스 커피, 아이스 티, 우유”였다. 같은 날 병동의 환자들은 “달걀 완숙, 리마 콩, 비트, 버터를 바르지 않은 흰 방, 우유 또는 블랙커피”였다.
펜실베이니아 주 법에 따르면 A 등급을 제외한 모든 우유는 저온살균되어야 한다. A 등급 우유는 1입방미터 당 박테리아가 5만 마리 미만이어야 한다. 1943년 1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워렌 주립병원의 환자 식당에서 나오는 우유를 대상으로 22번의 조사가 이뤄졌지만, 그 중 법적 기준을 충족시킨 경우는 6번에 불과했다. 저온살균처리되지 않은 이 날 우유의 박테리아 수는 1입방미터당 39만8100 마리였다. 이 조상 중 3번은 125만 마리를 넘었으며, 320만 마리를 넘은 적도 한 번 있었다.

과다수용에 따른 치료 부족

학대와 구속 장비의 징벌적 사용, 과다수용, 불충분한 음식 제공, 건물 노후화는 이 병원들이 합리적인 치료와 돌봄 기준을 지켰다면 모두 용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 병원들 거의 대부분이 극소수의 다른 훨신 더 좋은 병원보다 성과가 훨씬 떨어지며, 단순한 감금이 아니라 치료가 이 병원들의 주요 목적이라고 생각했을 때 기대되는 수준에 훨씬 못 미쳤다.
미국 전체에서 해마다 정신질환자 100명 당 증상 개선으로 석방되는 사람은 12명 미만이다. 이렇게 석방되는 사람들도 40% 이상은 통상 몇 달 안에 재입원해서 재수감된다.
과다수용이 심해지면 석방률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진주만 공습 이전 통계를 다시 인용하면, 107.5%를 수용하는 뉴멕시코주 병원들의 석방률은 4.1%에 불과하다. 반면, 일리노이 주 병원들은 수용 역량보다 몇백 명 정도만 과다수용하고 있다. 일리노이 주 석방률은 15.9%로, 누멕시코 주 석방률의 거의 4배다.
“특별 치료법”이라는 치료법이 8개 있다. 이 치료법은 정신병원이 현대 의학이 희망을 제공하는 경우의 상당 부분을 치료하거나 개선하는 정도에 대한 좋은 지표를 제공한다. 북부와 중부의 주들 대부분에서는 이 8개 치료법 모두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환자들에게 이용가능하다. 하비만 전쟁 위기 상황 이전인 1939년의 통계에 따르면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8개 치료법 중 2개만 제공하고 있다. 사우스다코타 주, 버몬트 주, 뉴멕시코 주, 애리조나 주, 네바다 주는 3개 치료법만을 제공하며, 앨러배마 주, 유타 주, 노스다코타 주는 4개 치료법만을 제공한다.
일부 병원에서 인력 부족과 환자 과잉은 의사들이 환자의 상당 부분에 대해 거의 손을 대지 못하는 정도의 상황을 만들었다. 환자의 거의 대부분은 훈련이 되지 않고 교육을 받지 않은 간수들로부터 치료 비슷한 것을 받는다. 아이오와 주 주립병원에 대한 정신건강재단 보고서를 살펴보자.
“간수들은 끊임없이 약물을 주며, 의사의 서명 없이, 구두 명령만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간수들은 구속 문제를 결정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간수들은 교육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 병원에는 간호사가 한 명도 없다.”
또 다른 아이오와 주 병원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자.
“직원들에 의한 분류와 가석방 추천은 체계적인 검토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검토는 1년 전에 시작됐지만, 시작된 지 몇 주 만에 별로 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가석방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많지만, 친척의 요청이 없는 한 가석방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당뇨병 환자들에 대한 특별식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 이런 특별식은 얼마 전까지는 제공되었지만 지금은 제공이 중지된 상태다. 당뇨병 환자들은 현재 다른 환자들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

가장 강한 사람도 쓰러질 만한 업무 부담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립 정신병원 의사들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진지하게 노력을 한다. 내가 가본 많은 병원에서 나는 수많은 남녀 의사들이 진정으로 영웅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았다. 오하이오 주 데이턴의 한 병원에서, 73세 노인 여의사는 은퇴를 하고도 병원에 나와 오랫 동안 일을 하기도 했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오는 경우도 많았다.

너무 많은 의사들이 능력 부족이다.

하지만 이런 의사들을 제외한 많은 의사들은 능력이 모자라고, 알코올 중독자이며, 정신병자다. 이들은 치료를 목적으로 잘 운영되는 병원에서는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한 결과는 인디애나 주 한 주립병원에 관한 보고서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서 석 달을 보내면서 나는 병동 의사가 진찰하는 시늉을 하는 것 외에는 진짜로 진찰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의사는 새로 입원한 환자들의 병상에 잠깐씩 들르곤 했다. 간호사들은 이 의사를 ‘도살업자’라고 불렀다. 종기를 칼로 재는 모습에서 딴 별명이다. 이 의사는 병동에 들러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도 거의 하지 않았다. 환자가 사망했다는 간호사의 전화 연락을 받으면 그는 ‘알았다.’는 말을 하는 게 다였다. 사망 환자들은 의사가 병동에 나타나지도 않은 채 시체 안치소로 실려갔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병원에 관한 보고서를 살펴보자.
“엉치뼈가 골절된 젊은 환자가 우리(서부 2병동, 남성 병동)에게 보내졌을 때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환자를 휠체어에 앉혀두었는데, 그건 우리가 그 환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의사들은 1주가 지날 때까지 아무도 우리의 실수를 바로 잡아주지 않았다.”
유타 주 주립병원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환자가 아프게 돼 직장 체온이 40.8도까지 올라갔다. 불려온 의사가 말했다. ‘가끔 체온이 올라가는 환자니 걱정할 필요 없소.’” 이런 무관심과 무능력함의 예(이런 예는 수백 건이나 있다)는 의사 면허를 소지한 사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의사만을 전폭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로드아일랜드 주 주립병원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자.
“간곡한 설득 끝에 우리 병동 의사는 결국 결핵 의심 환자를 진찰해 요양원으로 보냈다. 이 환자는 활동성 결핵으로 이틀 후에 사망했다. 이 의사가 다뤄야 하는 환자는 너무 많았다. 이 의사는 병원 환자 550명과 주립 교도소 수용자 200여명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런 증거가 쌓이면서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런 상황이 개선될 수는 있을까?” 다행히도, 미국의 다른 주처럼 상태가 나쁜 오하이오 주에서 대규모 개혁 운동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 운동은 1943년에 시작됐다. 클리블랜드 주립병원에 배치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클리블랜드의 지도층 인사인 목사 겸 박사 도레스 R 샤프(클리블랜드 주 침례교 협회 부회장)과 클리블랜드 프레스 지 월터 러치의 관심을 끌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진술서 꾸러미를 펼쳐놓았다. 내가 말한 환경과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이 적혀있는 진술서들이었다. 러치는 자체 조사를 통해 진술서들의 정확성을 검증한 후 1943년 10월 그 이야기를 클리블랜드 프레스 지에 실었다. 날이 갈수록 러치는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게 됐다.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타와 구속을 증명하고, 열악한 음식의 부적절성을 드러내고, 과다수용과 낮은 임금, 치료 방치에 대한 증거였다.
이 기사가 나가자 공무원들은 충격을 받아 “사실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환자 구타 혐의로 체포 명령이 내려진 간수 헤이든 블레이크가 경찰을 피해 뒷문으로 도망가도록 허용되는 일이 발생하자, 주지사는 조사를 허가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 은폐와 호도를 위한 시도가 이뤄졌다. 주 정부의 복지 국장이 실시한 “조사”로부터는 상황이 상당히 과장이 이뤄졌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발표됐다. 이 복지 국장은 오하이오 주의 정신병원들 운영의 최종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추문

클리블랜드 주립병원 원장 한스 리 박사가 구타를 저지른 간수들이 아닌, 불만을 표시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간수들을 해고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서 문제는 전체적으로 가라앉았을 수도 있었다. 러치가 다시 나섰다. 환자를 구타했다고 자백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증인들의 불만을 무시한 채 해고되지 않고 그대로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며칠 후 다른 간수가 체포됐다. 하루 이틀 뒤에는 환자 한 명이 탈출해 공개된 장소에서 자살을 했고, 관계 당국은 크게 당황했다. 기독교 단체들과 시민권 운동 단체들은 러치와 샤프를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고소와 맞고소가 진행된 지 8주 만에 진짜 조사를 촉구하는 시위였다. 브리커 주지사는 결국 진짜 조사를 위한 대표 위원회를 구성했다.
몇 달 동안 러치는 추가 고소들로 가득 찬 비판을 날렸다. 여성 환자 4명이 정신병원에 도착해 방에 가둬진 뒤 이 4명이 모두 폐렴에 걸려 사망할 때 아무도 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이 고온에 시달리는 상태였다는 것은 사망 당일에서야 밝혀졌다.
지하의 임시 시체 안치소에서는 쥐들의 노인 시체의 얼굴을 파먹기도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결핵 환자들을 수용하는 병상은 13개에 불과했는데, 이 병상들은 모두 병동 안쪽에 있어 햇빛도 들지 않고 통풍도 되지 않는 방에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병원장이 일상적인 순시를 할 때 동행한 것 외에는 의사들은 이 절망적인 상태의 환자들을 1~2주일 동안 한 번도 돌보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러치는 1944년 5월까지 더 많은 증거를 계속 수집했다. 최초의 폭로 기사가 나간 뒤 7개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당시 퇴임을 앞두고 있던 주지사는 프랭크 F 톨먼 박사를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주의 정신보건 국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일들이 진짜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몇 주 만에 클리블랜드 병원장은 자신이 사임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주지사의 그리스월드 위원회는 신랄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과거에는 부인됐던 혐의들을 확인하고 병원 추가 건설을 위해 3670만 달러 규모의 예산 집행을 권고하는 보고서였다. 하지만 샤프와 러치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 권고 사항이 적절하지 않고 “근본적인” 건설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권고는 매우 절박한 것이지만 직원 기준을 상승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인력 부족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계속 활동을 벌였고, 1945년 1월에는 샤프가 쿠야호가 카운티 대배심 의장으로 임명됨으로써 또 한 번의 전환을 맞았다. 이 활동적인 목사의 지도 아래 대배심은 오래된 공통 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클리블랜드 병원의 구석구석을 조사하도록 만들었다. 대배심은 주 정부를 “그렇게 참을 수 없고 야만적인 관행로 사람들에 옥죄는 문명화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이유로 기소하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다른 신문들과 힘을 합친 러치는 샤프의 제안을 최대로 활용했고, 미온적인 의회는 1700만 달러 규모의 정신병원 추가 건설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톨먼 하에서 최악의 학대는 제거되고 있으며, 적절한 기준을 향한 길고 험한 여정이 시작됐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핵심은 새로운 환자들이 진단을 위해 보내질 수 있는 특별 시설, 즉 법원 명령으로 “미친 사람들이 가는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낙인 없이 3개월 또는 그 이하의 기간 동안 집중적인 치료를 받게 만들 수 있는 병원들의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병원 중 첫 번째 병원이 지난 11월 문을 열었다. 환자 8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의사 2명, 심리학자 1명, 사회복지사 2명, 정규 간호사 14명, 직원 80명을 갖춘 영스타운 병원이다.
이런 종류의 집중적인 치료는 비용이 많이 든다. 오하이오 주의 대형 보호감독 정신병원에서 하루에 1.2달러를 사용하는 데 비해 이 치료는 하루에 6달러가 든다. 하지만 이 치료의 효과는 매우 크다. 영스타운 병원이 처음 3개월 운영되는 동안 환자 89명이 석방됐다. 평균 6주 정도만 입원했다 석방된 것이다. 이 석방자 중 71명은 “상태 호전”으로 가정으로 석방됐고, 적어도 외부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석방자 중 18명만이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
주가 얻는 이익도 분명하다. 300달러 미만(6주 동안의 집중치료 비용)으로 주 정부는 유용하고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시민들을 대거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동일한 경우를 수용하는 보호감독 기관들은 겉으로만 1일 유지 비용을 낮게 유지한 채 환자 1인당 쓰는 돈이 늘어나, 결국에는 이 시민들을 사회에 복귀시키는데 실패한다.
이런 소규모 집중치료 병원들 외에도 오하이오 주는 개혁 운동이 시작된 후부터 병상 수백 개를 확충했으며, 향후 수천 개 병상을 더 설치하고 있거나 설치할 계획을 세운 상태다.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강한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으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간수 역할이 아니라 의료 인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새로운 인력을 훈련시키려는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제에서 가혹행위를 하던 사람들, 무능력한 사람들은 이제 상당 부분 배제된 상태다. 환자에 대한 학대와 혹사는 이제 더 이상 자기만족적인 인내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오하이오 주 정신병원 개혁 운동 지도자들(행정부 소속이든 아니든)은 지금까지의 결과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이 지도자들의 주된 어려움은 간수, 의사, 간호사의 턱없이 낮은 임금과 그렇게 적은 돈에 하루 12시간을 일할 인력을 확보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들은 예산 책정액 부족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샤프 박사의 지도 하에서 새롭게 구성된 오하이오 정신보건협회는 병원 개선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집결지가 됐다. 로시 주지사는 인력 충원과 하루 8시간 근무 보장을 위해 자금 확보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병원 직원 임금의 대폭적인 인상과 함께 이런 조치들이 예산 할당에 인색한 의회의 승인을 통해 이뤄진다면, 오하이오 주는 50년 전 차지했던 정신질환자 돌봄 분야의 선도적인 위치를 다시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오하이오 주를 제외한 다른 주들에게는 오하이오 주의 경험은 개혁이 성취될 수 있는 효과적인 기법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아니다. 몇 년 동안을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최소한 지역사회의 지도층 인사들 일부는 집중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대중의 올바른 이해와 활동적인 지도자들이 있다면, 병원 개혁 운동은 오하이오 주에서처럼 어떤 주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열악한 병원들에 있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다른 누군가의 슬픈 경험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모든 목사, 모든 의사, 모든 지역사회 단체의 지도자는 정신질환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샤프나 러치 같은 지도자들이 있고, 사실에 입각한다면 모든 주의 사람들은 오하이오 주의 보통 사람들처럼 시위를 하고 활동을 벌여, 정신병원으로 위장한 강제수용소를 종식시키고, 감금이 아니라 치료를 정신건강 시설의 목표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