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죄다

Guilty of Being P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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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다

작성일2020.11.26

가난은 죄다
금정형주요양병원 진료과장 송 강

가난은 죄다(Guilty of Being Poor)

자크 카레의 《가난한 사람들의 교도소: 영국 구빈원에서의 경험, 포월(프랑스 혁명력으로 9월 말~10월 말)》에 대해
-닐 데이비, 2017년 1월 12일

《가난한 사람들의 교도소》에서 자크 카레는 구빈원 체계의 복잡한 진화에 초점을 맞춰,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 사이 영국의 빈곤과 빈곤층 구제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엄혹한 규율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구빈원은 몇 세기 동안 빈곤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책의 중심을 이루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폐지되지 않았다.

책 리뷰: 《가난한 사람들의 교도소: 영국 구빈원에서의 경험, 포월》 2016년, 537쪽

1601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영국과 웨일스는 국가의 빈곤층에 대한 지원 제공에 관한 국가 수준의 입법·사법 체계를 확보했다. 반복적으로 개정되고 수정되었지만 빈곤 법은 1940년대 말까지 계속 유지됐다. 이 법의 역사의 대부분에서 이 법은 일반적인 지침만을 제공했고, 개별 지역은 그 지침을 기초로 지원의 마련과 재정에 관한 핵심적인 결정들을 내려야 했다. ‘구호’라고 불리던 지역 지원의 한 부분 즉, 수 세기 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부분은 구빈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시작돼 1948년에 사라진 이 시설의 오랜 역사가 프랑스 역사학자 자크 카레(파리 소르본 대학 영국학 연구소 명예 교수)가 쓴 이 책의 주제다.

구빈원: 연속성과 변화

구빈원은 1830년대의 모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년)의 첫 부분에서 야만적이고 풍자적으로 묘사된 곳이 바로 이 구빈원이다. 디킨스에 따르면, 구빈원은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서서히 굶어 죽는 것 대신에, 집에서 나와서 바로 굶어 죽는 것 대신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머지않아 우리는 이 시기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교도소》의 강점 중 하나가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 구빈원의 덜 알려진 이전 형태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 구호, 즉 구빈원 외부로부터 오는 지원이 이 시기의 지역 지원의 주요 형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의 처음 두 부분은 가난한 사란들을 한 지붕 아래로 모으기 위한 지역의 계획이 다양하게 이뤄졌다는 놀라운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설들의 목적, 규모, 재원 조달 방법은 매우 다양했으며, 시설들의 이름도 다양했다. 이는 관계된 사람들(특히, 영국 의회 의원, 지역 의회 의원, 판사와 자선사업가)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한 것이며, 지역의 구체적인 특성들도 반영된 것이었다. 사례 연구들을 인용한 카레의 분석은,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의 특정한 구빈원들이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격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경범죄자들을 가두기 위한 시설을 “교정소”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참조하자). 이런 생각은 1618년 출처에 나오는 “절약을 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빈곤 관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공공질서와 공공도덕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 태도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은 아니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일부 구빈원들은 생산적인 노동, 종교적 훈육 또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사용해 가난한 사람들을 지역사회로 돌려보내는 데 중점을 두기도 했다. 1618년 출처의 저자가 쓴 “무능력과 결함에 의한 가난의 정의”, “피해자에 의한”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 사람들도 있었다. 노령자, 환자나 장애인, 고아와 미망인이 이 범주에 분류됐다.

빈곤의 원인과 빈곤 대처 방법이라는 주제에 관해 표현되는 다양한 의견 속에서 어떤 연속성이 관찰될 수는 있지만(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과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로 양분하는 고정관념, 19세기 동안 토론의 대상이었던 이 고정관념은 19세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관념”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1834년 수정 빈곤 법(신 빈곤 법으로 보통 부른다)이 영국과 웨일스에서의 빈곤 구제 개념과 정책 면에서 상당히 크고 확실한 변화를 반영한 것은 확실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빈원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역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랬다(우리가 이 정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구빈원이 없는 모든 지역은 이른 시일 내에 구빈원을 지어야 했다. 작은 지역들은 “연합(union)”으로 한데 합쳐 새 시설들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비용을 나눠 내도록 권장받았다. 게다가, 휘그당 정부는 런던에 새로운 중앙 행정 기관인 빈곤 법 위원회를 설립했다. 빈곤 법이 실제로 확실하게 적용하기 위한 위원회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 위원회는 지역들에 수많은 지시와 규정을 적용했으며, 이는 새로운 구빈원들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크 카레는 이 책의 가장 강력한 부분에서, 구빈원 역사에서 신 빈곤 법이 징벌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점을 밝혔다. 정부, 정부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구빈원은 억제라는 주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이 건강한 가난한 사람들(소위 “게으른 빈자들”)이 신발끈을 매고 나가 일을 찾도록 권장해야 했다. 이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구빈원 체제가 최대한 혹독하고 가혹해야 한다고 생각됐다. 선택된 체제는 사실 교도소 체제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불쾌하고 불편한 시설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은 가난한 사람들을 자극해 그들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면서 의존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됐다.

모호하고 논쟁적인 개혁

대안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어 보였다. 작가에 따르면, 이런 측면에서 19세기 구빈원은 그전의 시도들에 비해 기능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 직업 학교로 기능하던 구빈원은 현재 소외된 사람들과 확실하게 연결된 상태다. 이제 담장 안에 갇힌 수용자들에게 부과된 일은 일종의 처벌에 불과하게 됐다. 이런 일들은 가까운 미래나 먼 미래에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전통적인 시장에서 물러나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몸이 건강한 가난한 사람들은 비숙련 육체 노동을 해야 했다. 이런 노동은 이들의 사회 복귀를 전혀 준비해주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교정이 불가능한 낙오자 집단, 영원히 게으른 사람들, 문명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사람들로 여기는 이런 생각(당시 크게 늘어나고 있던 범죄를 저지른다고 비난받던 “범죄 계급” 같은 분류와 유사한 분류)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은 개혁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와 선교사들조차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공통적인 반대 중 하나는 새로운 구빈원 체제가 생산적인 일이라는 개념을 포기한 방식에 대해서였다. 이에 따라 몸이 건강한 가난한 사람들이 “정직한 노동”을 거부하는 현상이 교정되기 보다는 이런 노동에 대한 거부가 더 강해졌다. 급진주의자들과 노동자 계층도 새로운 법을 비판했다. 더 전통적인 보수당원들도 다수가 이 법에 반대했다. 이들은 이 법이 지역의 엘리트들의 정치적, 경제적 자율권에 대한 중앙 정부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신 빈곤 법을 반대하는 광범위한 시위가 발생했다. 반대는 공업 지역인 영국 북부에서 특히 거셌고, 폭력이 동반되기도 했다. 비판이 확산되고, 여기에 법 준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가 없다는 상황이 더해지자 새로운 구빈원이 영국과 웨일스의 지역 구호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몇십 년이 걸린 사례들도 있다)이 걸리게 됐다.

자크 카레는 이 시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부 정책의 핵심에 모호함, 심지어는 모순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수정 빈곤 법이 특히 몸이 건강한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된 문제들에 대처하는데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위에서 보았다. 새로운 구빈원은 이런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주 목적으로 했으며, 이 방법이 효과가 없을 때는 이들을 처벌 그리고/또는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지독하게 힘들고 단조로운 육체노동에 기초한 구빈원 체제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남자들은 돌을 깨거나, 뼈를 갈거나, 밧줄을 푸는 것 같은 노동을 했고, 여자들은 설거지, 다리미질, 요리, 바느질 같은 일을 주로 했다.(이런 노동들은 구빈원 시설 운영비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노동은 당시의 교도소 재소자들이 하던 노동이었다. 실제로 구빈원 수용자들은 이런 노동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빈원에 수용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들로 구성된 노동자 계층은 구빈원을 “바스티유 감옥”이라는 말로 흔하게 불렀다.

모호함과 모순의 문제로 돌아가면, 정부 관료와 의회 의원, 시사 평론가들은 “몸이 건강한 가난한 사람들(특히 몸이 건강한 가난한 남성들)의 문제”에 주로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 집단은 실제로 구빈원에 사는 소수의 사람들일뿐이었다. 예를 들어, 1860년에는 구빈원 수용자의 5%만이 이 범주 출신이라는 집계가 나나왔다. 바꿔 말하면, “게으른” 가난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만들어진 구빈원 체제가 “도움을 받을 만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추출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게 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도움을 받을 만한” 가난한 사람들은 개선을 할 필요도, 처벌을 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저자는 “현재 구빈원의 비극은 구빈원의 이론적 논리와 현실에서의 필요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있다”고 말한다. 19세기 말이 되자 이런 모순에 대한 인식이 구빈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구빈원 수용자에게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빈원 환경은 매우 느리고 고르지 못하게 개선됐다. 구빈원에 갇힐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포와 수치심은 이보다 훨씬 더 느리게 변화했다. 이런 상황은 20세기 내내 대중문화에서 크게 비춰졌다.

결론

300년이 넘는 영국 구빈원의 복잡한 역사를 이론과 실제 면에서 추적한 내용을 책으로 쓴다는 것은 매우 야심적인 일이다. 이 책만 해도 500쪽이 넘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교도소》는 이 복잡한 역사 속으로 우리를 성공적으로 인도한다. 이 책은 주제에 관련된 법률의 변화, 토론 내용을 명확하고 해박하게 다루면서, 구빈원 체의 모든 수준에 관계된 다양한 요인들을 설명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한 저자는 거의 없다. 불가피하게, 이 주제를 선택함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구빈원에서의 일상생활(수용자의 하루 일정, 노동에 의한 역할 분담, 종교와 (가끔 있는) 여가, 구빈원 직원의 채용과 행동, 구빈원의 건물 구조와 공간 배치, 수용자 처벌의 정도와 속성 등)을 자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는 다른 자료, 특히 영국의 지역 기록보관소의 풍부한 기록들에 기초한 연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834년 수정 빈곤 법 통과 이전의 빈곤 구호의 핵심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한 외부 지원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참고도서 목록은 이런 점들에 대한 유용한 지침 역할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교도소》는 17~20세기 영국의 빈곤과 빈곤 구호의 역사에 대한 귀중한 도입부 역할을 할 것이며, 영국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과 일반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