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번트증후군 (Savant syndrome)

토마스 위긴스

토마스 위긴스(Thomas Wiggins)

놀라운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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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위긴스Thomas Wiggins는 수년 간 "블라인드 톰Blind Tom"으로 불려 왔다. 그는 미국 남북 전쟁 시기에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음악 서번트이다. 그는 음악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고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흑인 콘서트 아티스트였지만, 최근에 그의 생애와 명성이 부활하여 더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톰은 시각장애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놀라운 재능을 보였고 이후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는 놀라운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11살에 톰은 백악관에서 연주했고 16살에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 1866년 톰을 관찰한 의사이자 교육자 에드워드 시퀸Edward Sequin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톰의 어휘는 100단어도 안되었지만 그의 음악 레퍼토리는 7000곡이 넘었다고 기술했다. 블라인드 톰에 대한 그 당시의 방대한 문서, 간행물 및 신문 기사를 본다면 그가 정말 엄청난 음악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이 먼 노예의 삶

이 놀라운 음악 서번트에 대한 이야기는 1850년 그의 어머니 채리티 위긴스Charity Wiggins가 조지아주 콜럼버스의 저명한 변호사인 제임스 베튠 James Bethune 장군의 노예로 팔리면서 시작된다. 1849년에 태어난 그녀의 열두 번째(또는 일부 기록에 따르면 14번째) 아이 톰은 완전히 눈이 멀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주인은 톰을 키우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톰의 어머니가 경계하지 않았다면 톰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톰이 9개월이 되었을 때 그의 주인은 맹인 아기와 그의 두 누나, 부모를 경매에 올렸다. 가족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말이다. 누군가 톰을 구매할 가능성은 희박했기에 그의 죽음은 확실했다. 그러나 톰의 목숨은 어머니인 채리티의 끈기 덕분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웃인 베튠 장군에게 다가가 경매에서 가족을 구해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장군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경매 당일 노예 시장에 나타나 가족을 사들였다.
그의 새 주인은 그에게 토마스 그린 베튠이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새 주인의 농장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톰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리를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탉이 울면 같은 소리를 낸다던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동생 때리기도 했다. 오두막에 혼자 내버려두면 의자를 끌거나 냄비를 두드려 소음을 만들었다. 톰은 자연을 사랑했고 모든 유형의 소리에 매료되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음악에 빠져들었다. 장군의 조지아 농장에서 톰은 저택의 방을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되었다. 톰은 장군의 딸들이 피아노로 소나타와 미뉴에트를 연습하는 것을 열중해서 듣곤 했다.

음악적 재능의 발견

유아기에 톰은 음악 및 기타 모든 소리에 매료되어 반응을 보였다. 그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음을 재현할 수 있었고 그의 가족이 부르는 모든 노래에 화음을 넣을 수 있었다. 여느 노예 아이처럼 톰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고 다른 분야에는 소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항상 불안해하고 다혈질이었기에 지속적인 감독이 필요했다. 그는 피아노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으며 어떤 도움 없이도 음악을 들은 후 그대로 오류 없이 연주 할 수 있었다. 5살 때 톰은 뇌우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The Rainstorm"라는 곡을 작곡했다.

톰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된 계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어느 날 베튠의 집에 손님이 방문했고, 딸 중 한 명이 피아노를 치며 모두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려운 곡을 끝내고 점심이 나왔는데, 손님이 테이블에 앉자 몇 분 전에 베튠의 딸이 연주한 곡이 비어있을 응접실에서 흘러 나왔다. 눈먼 소년 톰이 방금 들었던 어려운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톰이 네 살이 되기 전, 낮에 딸들이 연주했던 피아노곡을 밤에 연주하여 베튠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톰은 복잡한 곡도 한 번만 들으면 연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베튠 장군은 전문 음악가를 고용, 톰이 그들의 연주를 듣고 재현하도록 즉각적인 콘서트 레퍼토리를 만들었다.

콘서트의 시작과 국제적인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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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먼 천재"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1857년 8살 나이에 톰은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공연은 연일 매진이었고 열광적인 신문 보도 덕택에 베튠 장군과 어린 톰은 콘서트 투어를 떠나 거의 매일 공연을 했다. 톰은 콘서트를 시작한 첫해에 10만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그는 마크 트웨인, 윌라 캐더, 스타인벡과 같은 작가들이 찬양하는 유명인이 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블라인드 톰에 관심이 많았으며 가능한 자주 톰의 공연을 관람했다. 마크 트웨인은 톰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림 5. 톰의 공연 홍보 포스터나 티켓에는 항상 “시대의 위대한 음악 신동, 살아있는 가장 놀라운 음악 천재The Great Musical Prodigy of the Age, The Most Marvellous Musical Genius Living”라는 홍보 문구가 새겨졌다.

“그는 독재자처럼 청중의 감정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폭풍처럼 우리들을 전장으로 휩쓸어 갔습니다. 그는 꿈속에서나 들릴 듯한 부드러운 멜로디로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진정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숲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매혹적인 공기를 통해 관객들을 행복하고 유쾌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곡이 끝나고 청중이 박수갈채를 보낼 때마다 이 행복하고 순수한 사람도 같이 힘차게 박수를 쳤습니다.” 트웨인은 톰을 “대천사”라고 불렀다.
톰이 들었던 모든 곡의 모든 음표는 그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게 각인되었으며, 그는 어떤 곡이든 주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현할 수 있었다. 그의 레퍼토리로는 베토벤, 멘델스존, 바흐, 쇼팽, 베르디, 로시니, 도니제티, 마이어비어 등이었다. 한 신문 기사에는 7000개가 넘는 그의 레퍼토리가 나열되었고 다른 기사에는 그의 기억이 너무 정확하여 15분 길이의 설교를 그대로 반복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한 번의 청취 후에 프랑스어 또는 독일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고도 보도되었다. 톰은 클래식을 연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등지고 왼손과 오른손을 바꾸어서도 정확하게 곡을 연주해서 청중을 놀라게 했다. 톰은 보통 자신과 그의 작품을 3인칭으로 소개했는데, 이는 서번트 증후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11세인 1860년에 톰은 백악관의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앞에서 연주했다. 톰이 관객과 대통령을 속였다고 느꼈던 몇몇 음악가는 다음날 호텔에서 톰을 테스트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두 곡을 연주했다. 13페이지 길이의 첫 번째 곡을 톰은 실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했고, 20페이지 길이의 두 번째 곡도 완벽하게 연주했다.

1866년 톰은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한 콘서트에서 톰은 피아노 두 대가 동시에 시끄럽게 연주되면서, 세 번째 피아노에서 20개의 음표가 연주되는 것을 들었다. 톰은 이 20개의 음표를 완벽하게 구별하고 재현하는 능력을 보였고 그의 절대 음감을 증명했다. 그의 콘서트에는 항상 관객이 톰이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전에 듣지 못했던 곡을 연주하는 도전 부분이 있었고 그는 항상 성공했다. 그의 또 다른 능력은 세 가지 다른 곡을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양키 두들Yankee Doodle"을, 왼손으로 "Fisher's Hornpipe"를 연주하고, "Early in the Morning”을 노래했다. 남북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블라인드 톰은 북미와 유럽에서 공연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베툰 장군의 죽음과 은퇴

유럽 투어가 끝난 후 톰은 다시 미국의 청중들을 위해 연주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톰은 베튠 가족에게 750,000 달러 이상을 벌어 주었다. 베튠 장군의 죽음 이후 톰의 보살핌은 베튠 장군의 아들 존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톰을 보살피는 것과 콘서트 진행에 대한 격렬한 분쟁이 발생했다. 법적 공방은 끊이지 않았고 1883년 존이 사망한 후 1904년 뉴욕에서 열린 짧은 콘서트를 제외하고 톰은 1908년 6월 13일 뉴저지 호보켄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톰은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백인 주인과 보호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정당한 수입을 받지 못했다. 노예 해방도 그를 그 족쇄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주인의 아들인 존 베튠 John Bethune이 후견인 겸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되면서 1872년 톰은 정신이상자 진단을 받았다. 이를 통해 그가 번 돈(오늘날 5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은 베튠의 사치에 낭비되었다. 1884년에 존 베튠은 철도 사고로 사망했지만 톰은 여전히 노예와 다름없었다. 그의 죽음 당시 존 베튠은 이혼 소송 중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엘리자 베튠Eliza Bethune은 자신이 유언장에서 제외된 것을 알고는 톰의 빈곤한 어머니를 찾아 그녀가 뉴욕에서 소송을 제기하도록 설득했다. 3년에 걸친 법정 공방에서 1887년 그들이 승리했다. 블라인드 톰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마지막 노예가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톰의 이른바 '해방'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톰의 엄마 채리티가 톰의 후견인 자격을 엘리자 베튠에게 넘겨주자 채리티는 버려졌고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1908년 60세의 나이에 블라인드 톰은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브루클린의 에버그린 공동묘지의 묘비 없는 빈민들의 무덤에 묻혔다.

확대 ▲ 그림 10. 톰이 10살 때 열린 콘서트의 포스터
확대 ▲ 그림 11. 17살 유럽투어 콘서트의 포스터
확대 ▲ 그림 12. 30대 톰의 초상사진
확대 ▲ 그림 13. 톰의 후예들은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한 노력했지만, 끝내 그의 유골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2002년 7월 1일 Tom을 기리기 위한 묘비가 이스트 뉴욕의 Evergreens Cemetery에 세워졌다.

현대에 되살아난 블라인드 톰의 명성

1세기가 지난 지금 뉴욕의 피아니스트 존 데이비스John Davis는 블라인드 톰의 오리지널 음악 14곡을 <John Davis Plays Blind Tom>이라 제목으로 녹음해서 2000년에 CD로 발매했다. 갤럽, 왈츠, 폴카, 행진곡 및 야상곡이 포함되었으며 톰이 5살 때 작곡한 "비바람The Rainstorm", 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마나사스 전투The Battle of Manassas"가 포함되었다. 15세에 전쟁 소식을 듣고 영감을 받아 쓴 이 곡은 직접 만든 기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로 전투를 연상하게 한다.

확대 ▲ 그림 14. 베튠 장군과 톰

참고문헌과 사이트
『Islands of Genius』, 2010, Darold A. Treffert
http://www.blindtom.org/#/who-was-blind-tom/